최원석 연출은 2012년도 극단 '인어'를 창단하면서 국립극단 배우에서 연출자로, 극작가로 광폭적인 행보를 보여왔다. 극단 인어는 "현시대를 지배하는 자본 및 권력과 폭력의 문제를 무대로 형상화하는데 집중"한다고 할 만큼, 연출가 최원석은 한국사회의 환부와 부조리를 날카롭게 파고 든다. 백화점 감정노동자들이 살아가는 이야기를 다루었던 <불멸의 여자>(2013)는 원작을 모티브로 연극적인 영화(2023)로 제작되면서 화제가 되었고, 웨일즈 국제영화제(WIFF)에서 베스트극영화상을 수상했다. 최원석의 작·연출로 민중과 지식인의 몰락을 그려낸 연극 <변태>(變態, 2014)는 시대의 언어는 죽어가고 시인의 시적 욕망은 현실로 용해되지 못한 관념과 이상(理想)의 언어로만 존재할 수밖에 없는 현실의 우울함을 드러낸 연극이었다. <빌미>(2019)에서는 한국사회의 부패한 지식인을 통해 인간의 파멸과 몰락을 그려냈고, <살색>(2022)은 복수의 업보(業報)와 비극적 운명을 강렬한 무대와 배우들의 연기로 환기시키며 3시간 동안 몰입감을 높인 작품이었다. 2023년 최원석 연출은 경남도립극단 예술감독이 되었고, 아서 밀러(Arthur Miller)의 <시련>을 원제 그대로 <도가니>(The Crucible, 이하 크루서블)로 무대에 올려 경남도립극단 예술감독 데뷔전을 성공적으로 치루었다. 최원석의 <도가니>(2023)는 국공립극단의 대중성과 예술성를 동시에 성취한 공연이라 할 수 있다.
◆ 진실이 실종되고 거짓이 정의의 진실로 둔갑되는, 세상과 정치판을 닮은 서사
아서 밀러(Arthur Miller, 1915-2005)의 <크루서블>은 1952년 희곡으로 발표되어 1953년 브로드웨이에서 초연되었는데, 이때는 냉전 시대의 매카시즘이 정점에 달했던 시기였다. 아서밀러는 1692년 미국 메사추세츠 주 에섹스 카운티 세일럼 청교도 마을에서 발생한 마녀사냥 재판 실화를 모티브로, 존 프락터의 죽음까지 4막으로 구성된 <크루서블>를 발표해 당시의 미국 사회를 날카롭게 비판했다. 세일럼에서의 실제 마녀재판으로 돌아가 보자. 17세기 청교도 교리가 확산될 무렵인 1692년부터 1693년 5월까지 미국 메사추세츠 주 에섹스 카운티에서는 재판이 이루어졌다. 청교도를 거부하는 시민은 악령을 믿는 마귀로 내몰려 여성과 남성 19명이 참혹한 교수형에 처해 졌고, 인간들의 집단적 광기로 돌에 압사한 시민들도 있었다. 8명은 마녀로 지목되었고, 150명이 기소되었으나 증거불충분으로 풀려났다. 아서 밀러의 <크루서블>속 마녀재판과 비교되는 몇 작품이 있는데, 마녀로 몰린 여성에 대한 억압과 차별, 가부장제, 억압적인 청교도 윤리를 그려낸 카릴 처칠(Caryl Churchill) 의 <비네거 탐>(Vinegar Tom)의 배경도 17세기 청교도의 시기였다. 2018년 대안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인 마리즈 콩테의 대표작으로 국내에는 <나, 티투바 세일럼의 검은 마녀>(2019)로 번역된 장편소설도 세일럼 마을에서 벌어진 마녀사냥 재판과 흑인 하녀 티투바의 욕망을 그려내고 있다.
마녀사냥을 다른 전작 작품과는 달리, 아서 밀러는 역사적 사실과 작가의 상상력을 더해 존 프락터를 중심으로 세일럼 마녀재판을 재구성한다. 등장인물과 사건의 전개 과정에서 역사적 사실을 묘사하고 있는 원작의 무게는 살리면서도 이번 각색 공연에서 최원석은 엘리자벳 프록터와 존 프록터의 관계에 중심을 두었다. 마녀사냥으로 인간의 광기가 쇳덩이처럼 달궈지고 집단최면의 숲에서 헤어나올 수 없는 상황 속에서 진실은 추악한 거짓과 청교도주의로 용해된다. <크루서블>의 집단적 편가르기와 마녀사냥, 진실의 실종은 거짓이 정의의 진실로 둔갑되는 요즘 세상과 정치판을 닮아있다. 매서운 펀치 한 방은 180분 동안 원작의 중요 사건과 플롯은 유지하면서도 전작 공연에서 볼 수 없었던 강렬한 연출의 무대를 보여줬다는 점이다. 특히 무대와 장면을 구현한 장치들에서 "요즘도 별반 다르지 않잖아?"라며 세일럼 마을의 도가니 세상을 비웃듯 연출의 메타포가 현실적 의미로 발현되는 지점은 훌륭하다. 프롤로그는 흑인 하녀였던 티투바(박시우 분)의 기억으로부터 시작된다. 노파가 되어버린 티투바는 30년 전 1692년 사건의 발단이 된 숲속으로 시간을 되돌린다.
◆ 180분 동안 성공적인 1차 방어전을 치른 최원석의 연출 스타일
무대는 마법과 악령들이 숲속을 맴도는 것같은 신비스러움을 준다. 마법과 체면에 걸린 마을에 들어선 것같은 분위기, 무대 뒤편은 몰락해 가는 낡은 청교도 교회당이 미세한 형체로 보인다. 무대 중앙은 회전무대로 만들었다. 공간은 패리스 목사 집, 존 프락터의 집, 법정 등으로 장면 전환을 할 수 있도록 했는데, 집 구조 상단을 목재 프레임으로 연결해 마녀사냥으로 쌓여가는 사건과 죽음들이 서로 연결되어 있음을 짐작케 한다. 특히 2층으로 된 페리스 목사의 집을 단층으로 보이게 하고 오케스트라 공간을 1층 혹은 지하로 처리해 하녀와 소녀(메리, 퍼트넘 티투바, 애비게일)들의 이동 공간으로 처리했다. 공간을 분리해 지하는 종교적 위계와 몰락, 권력, 집단적 마녀사냥으로 시체들이 넘쳐나는 죽음의 공간과 강으로 처리했는데, 연출의 해석이 돋보이는 지점이다. 마치 마을의 집들이 시체의 무덤이 되는 것처럼. 마녀사냥의 발단이 된 중심인물 애비게일(박애진 분)은 원작과 달리 21살의 처녀로 각색되었다. 그 외 존 프락터는 40대 후반의 농부로, 티투바는 30대 초중반의 흑인 노예로 설정했다. 원작에서는 티투바를 소녀들에게 무속신앙으로 주술을 거는 흑인 여성으로 그리고 있는데, 각색된 이번 공연에서는 티투바의 주술을 놀이 행위로 묘사하고 그녀를 패리스 목사에 의해 마녀사냥으로 희생당하는 여성으로 그리고 있다.
공연 <도가니>의 서사는 이렇다. 서막에는 1692년 세일럼 마을을 떠난 티투바가 60살이 되어 마을로 다시 팔려 온 것으로 시작된다. 그녀의 세일럼 마을에 대한 기억은 숲속에서 혼령을 부르는 마귀놀이 현장으로 돌아간다. 옷을 벗은 소녀들, 엘리자벳 프락터(윤재진 분)을 향한 애비게일의 저주 의식이 벌어지고, 패리스 목사의 딸 베티(소정은 분)가 발작을 일으키면서 공포로 마을이 휩싸인다. 죽어가는 아기들, 죽은 세일럼 마을의 영혼들, 믿음이 충분하지 않은 시민과 아이들의 영혼을 추악한 악마가 지배하고 있다는 소문이 퍼지게 된다. 소녀들이 나체로 춘 숲속의 춤은 악마를 부르는 주술행위로 소문이 퍼지고, 패리스 목사의 딸 베티의 발작도 악마의 지배 때문이라는 꼬리에 꼬리를 무는 소문들이 퍼진다. 소녀들과 음모를 꾸미고 거짓 고백을 하게 하면서 세일럼 마을의 마녀사냥은 광기와 분노, 폭로와 거짓 자백으로 이어진다. 진실이 충분하지 않은 시민들은 악마가 지배하는 인간으로, 청교도를 거부하는 자로 낙인찍혀 재판에 넘겨진다.
1막은 베티의 발작으로 발화된 마녀사냥의 시작이다. 애비게일을 중심으로 엘리자벳 프락터에 대한 증오와 복수, 거짓 음모가 꾸며지고, 존 프락터와 애비게일의 비밀스러운 관계가 밝혀지는 와중에, 존 해일 목사(장정식 분)는 세일럼 마을에 출몰한 악마의 존재를 밝히기 위한 퇴마사처럼 등장한다. 악마를 사이에 두고 꼬일 대로 꼬여가는 진실게임이 흥미롭게 펼쳐진다. 애비게일은 살아남기 위해 소녀들과 실제 귀신의 혼령이 씌인 것처럼 행동하고, 엘리자벳 프락터로부터 해고를 당한 애비게일의 복수와 증오가 더해지면서, 진실은 도가니 속으로 빨려들어간다. 2막에서는 존 프락터의 고백과 엘리자벳 프락터의 심리적인 관계가 세밀하게 묘사된다. 거짓의 음모로 치닫는 애비게일의 복수극이 2막을 지탱한다. 애비게일은 메리 워렌(박미영 분)한테 바늘이 꽂힌 저주의 인형을 주고 인형은 엘리자베스 프락터 집에 있는 악마의 인형으로 둔갑된다. 패리스 목사와 저녁 식사를 하다 마룻바닥에 쓰러진 애비게일은 엘리자벳 프락터의 혼령이 찾아가 바늘을 꽂았다고 거짓 증언을 하고, 엘리자벳이 감옥에 갇히자 존 프락터는 아내를 구하기 위해 하녀 메리 워렌의 진실된 법정 고백을 유도한다. 세일럼 마을의 악령의 실체적 진실을 놓고 벌이는 진실게임은 비극의 용광로처럼 타오르는 추악한 인간의 광기와 욕망, 존 프록터와 에비게일과의 간음과 정사, 세일럼 마을을 죽음의 무덤으로 몰고 가는 마녀사냥, 꼬리에 꼬리를 무는 인간의 거짓과 애증이 교차되면서 극적인 긴장감으로 몰입감을 높인다. 2막의 마지막 장면, 존 프락터 주변 청도교를 상징하는 황금 촛대의 불이 밝혀진다.
3막은 악마의 실체를 두고 벌이는 법정 공방이다. 존 프락터의 간음이 밝혀지고 애비게일을 비롯한 소녀들의 법정에서의 악마놀이는 극에 달한다. 존 프락터는 마녀사냥의 악마가 되어간다. 4막의 핵심 내용은 존 프락터의 자백이다. 남편에게 불리한 증언을 하는 엘리자벳 프락터, 재판관 댄포스(김중기 분)는 악마와 내통했다는 자백을 강요한다. 존 프락터는 자백서를 찢어 버리고 "하나님은 죽었다!"며 절규한다. 인간의 양심을 살기 위해 바꿀 수 없는 존 프락터의 외침은 정의와 진실이 왜곡되는 오늘의 현실을 되돌아보게 한다. 마지막 존 프락터의 교수형과 청도교 박해까지 3시간 동안 긴장감을 놓치지 않는 장면전환과 배우들의 연기가 시각적으로 형상화된다. 최원석 연출이 만든 감각적인 장면도 이번 공연에서는 놓칠 수 없다. 특히 법정 장면에서 애비게일과 소녀들의 악령이 깃든 연기를 인형 오브제로 구현한 점, 집의 지하를 마녀사냥으로 죽어간 무덤으로 처리한 점, 청교도의 교회당을 무대까지 파괴시킨 점, 집의 천장을 붕괴시켜 무너진 구조물이 십자가 형태가 되도록 설정하고 마녀사냥으로 파멸되어 가는 존 프락터와 연결시킨 점이 두드러졌다.
◆ 배우들의 체화된 연기와 감정으로 발열되는 소리
아서 밀러의 <크루서블>는 애비게일, 존 프락터, 엘리자벳 프록터와 존 해일, 댄포스와 소녀들까지 극 중 인물이 장면으로 섬세하게 맞물리기 때문에 배우들의 연기가 중요한 작품이다. 전체 균형감이나 앙상블적 호흡이 대화 사이 1, 2초 정도라도, 계산되지 못한 자기중심적연기로 치우치면 공연은 생산적이지 못한데, 이번 <도가니>는 극을 끌고 가는 공격수와 극을 안정적으로 받쳐주는 수비수로 나뉜 배우들의 역할이 도립극단 이상의 역량을 보여주었다. 공격수 역할을 하는 배우들은 박예진(애비게일)과 소녀들, 한갑수(존 프락터), 윤재진(엘리자벳 프락터)인데, 존 프락터 역의 한갑수는 4막까지 지치지 않고 안정적인 대사와 육화된 연기를 보여주었다. 특히 연민을 자극하며 몰락해 가는 한 남자의 비극성을 최대치로 끌어올려 표현했다. 몰아치는 대사에서는 목소리가 끊길 만도 한데 그 자체로 감정이 되었다. 감정이 흔들이지 않는다는 것은 훈련된 배우만이 가능하다. 엘리자벳 프락터 역의 윤재진은 한갑수의 몰아치는 감각적인 연기를 중화시켜 강인한 여성의 내면을 섬세하게 표현했다. 이번 공연의 최대 수확은 애비게일 역의 박예진이다. 팜프 파탈적 매혹, 강렬한 대사와 감정을 뱉고 조절하는 감각적인 속도감, 소녀들과 마귀의 혼령이 깃든 것처럼 연기하는 몸(신체)을 통해 체화된 연기를 보여주었다. 연기는 좋았지만, 애비게일의 완전한 인물화에는 아쉬움이 남는다. 박예진 배우는 순화적인 연기를 체득해 나가면 배우로 성장 속도가 빠를 것이다. 젊은 배우들이 흔히 빠지는 함정은 몰아치는 연기에서 감정이 인물과 체화(體化)되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인물되기에서 빠르게 적응되는 연기는 분노의 연기다. 감정 집중만 견디면 이런 패턴의 연기는 연출의 조련으로 가능하다. 문제는 정서적인 인물화다. 내면으로 응집되는 인물인데, 인물이 배우의 몸, 감각, 정서로 꽉 차게 되면 소리와 감정의 볼륨하고는 관계없이 그 자체가 감정으로 발열된다. 이번 공연에서는 이런 단계를 연기한 배우 한갑수, 윤재진, 김수진이 무대에서 공격수 역할을 맡은 것이다.
수비수의 역할을 소화한 윤하진(패리스 목사), 장정식(존 해일 목사), 김중기(댄포스 부지사), 김수희(레베카 너스)도 있다. 윤하진과 장정식은 훈련된 발성과 소리로 은폐와 음모로 청교도적 욕망을 드러내는 패리스 목사와 진실과 정의를 밝혀내려는 존 해일 목사의 대립적 관계를 잘 보여주었다. 수비수의 정점은 김수희다. 교수대에 오른 존 프락터를 향해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마세요! 또 다른 심판이 우리 모두를 기다리고 있어요" 라고 말하는 대사는 마녀사냥으로 죽음을 예견하며 진실이 실종되어 가는 상황에 대한 참혹함을 덤덤하게 표현해 주었다. 정적의 무대 위 절대 음감의 감정은 그만큼 묵직했다. 댄포스 부지사 역의 김중기가 다른 배우들과 연기행동과 소리음색의 발란스가 달랐던 것은 이번 공연의 절묘한 신의 한수였다. 이번 최원석 연출의 <도가니>는 감각이 본능적으로 발화될 수 있는 배우의 한계점까지 도전적으로 인물구현에 임하는 배우들의 탐구적인 자세가 응집된 작품이다. 빠른 대사 암기를 통한 반복 훈련과 연습은 최원석 연출의 특기인데, 완벽해질수록 인물과 체화되는 속도가 빨라지고, 그 지점을 넘어서면 연기는 현존하는 본능의 감각이 된다. 경남도립극단은 내년도 정기공연을 최원석 연출로 박조열의 <오장군의 발톱>을 준비하고 있다.
대경대학교 연극영화과 교수(연극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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