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사 기념물과 조형물은 상징성에 포함되어 있는 정신적 가치가 중요하다. 대구 북방 22km에 있는 다부동 전투기념관 형상은 전차 모형이다. 국기 게양대는 전차의 안테나이고 주 전시실은 몸통이며 부속실은 궤도를 형상화하였다. 기념관을 전차 형상으로 본뜬 것은 그만큼 전차가 유학산 기슭에 있는 다부동 전투 현장에서 결정적 역할을 하였기 때문이었다.
문재인 정부시절 백선엽 장군이 돌아가셨을 때 친일행위자로 몰아 국립묘지 안장을 거부하자 유족들은 6·25전쟁의 분수령이 되었던 다부동 전투전적비 옆이라도 안장되길 희망하였으나 다부동 전투야 말로 종북 주사파들의 눈에는 가시같은 일이기에 안장을 불허하였다. 정전 70주년을 맞아 독지가의 지원으로 백선엽 장군, 트루먼 대통령과 이승만 대통령의 동상도 세워졌다.
물론 크게보면 두 분 대통령의 동상이 들어서는 것도 의미가 있으나 다부동 전투 기념관에 굳이 동상을 세운다면 다부동 전투에 결정적 공로가 있는 워커 장군, 백 장군, 마이켈리스 대령의 동상이나 흉상을 세우는 일이 더 타당하다는 생각이다. 그 이유는 낙동강 방어선 전투 당시 여러 곳이 어려웠지만 8군 예비대를 다부동에 투입하여 대구 방어에 결정적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다부동 전투는 대구 방어의 최후 보루
1950년 8월 하순 대구 정면의 전세 약화로 정부와 국회는 부산으로 이동하였고 국방부와 내무부만 미 8군 사령부와 대구에서 한국군과 경찰의 작전을 통제하고 있었다. 북한군의 공세가 8월31일부터 시작되어 워커 장군은 국방부의 부산 이동을 권했다. 국방장관 신성모는 내무장관 조병옥에게도 부산 이동을 권했으나 조병옥은 전투에 임하는 전투경찰이 싸우고 있는 대구에 잔류하여 끝까지 저지할 것이라고 답변하고 이동을 거절했다. 이때 조병옥은 워커에게 적에게 대구를 빼앗기게 될 경우 부산 교두보 또한 방어하기 힘들 것이고 따라서 유엔군은 됭케르크나 바탄 반도의 비운을 자아내게 될 것이라고 강변했다.
8군사령부는 예비방어선인 데이비드선으로 철수작전을 고려하고 유엔군사령부에서는 상륙작전을 앞두고 현 전선이 유지될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하여 크게 우려하고 있었다. 전황을 분석한 워커는 현 전선 사수를 결심하고 다만 지휘통신 장비인 텔레타이프를 보호하기 위하여 8군사령부만 부산수산대학(현 부경대학)으로 이동시켰으나 사령관을 비롯한 참모들은 대구에 있는 전방지휘소에서 작전통제를 계속했다.
당시 국군 1사단이 지킨 다부동은 적 3개 사단의 집중 공격을 받았던 요지에 해당되었고 건물로 치면 기둥에 해당하는 곳이었다. 다부동 지역은 맞은 편의 가산산성과 더불어 옛부터 주요 군사기동이 이루어졌던 관문에 해당하였다.
◆백선엽 장군의 부하애와 인간미가 자신과 다부동을 구해
북한군이 총력공격을 하고 백척간두의 아슬아슬한 순간에 예비대가 부족하였던 백 장군은 인접 영천지역의 유재흥 2군단장에게 예비 1개 대대의 지원요청을 하였다. 전사에는 그 부대가 8사단 10연대 2대대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응급 지원을 명받은 대대장은 영천에서 다부동까지 밤을 세워 행군하여 도착했다. 실로 전선이 무너지기 일보 직전이었다. 도착과 동시에 작전참모 문형태 중령은 방어진지 보강을 위하여 바로 유학산 능선으로 올라가라고 지시하였다.
그러나 이 보고를 들었던 사단장 백선엽 장군은 대대장에게 병사들이 밥은 먹었느냐고 물어보고 병사들이 밥을 못 먹었다고 하자 날이 어두우니 밥을 먹이고 날이 밝으면 올려보내라고 작전참모에게 지시하였다. 바로 다음 날 아침에 사단지휘소로 북한군이 침투하여 기습공격을 받았는데 그 대대가 없었더라면 1사단은 와해 되고 사단장이 포로가 될 뻔한 절체절명의 순간이었다. "밥이나 멕여 보내라"고 한 따듯한 인간애가 백 장군을 위기에서 구하였고 백 장군은 다부동을 구했으며 다부동은 대한민국을 구했다.
◆다부동 전투는 '볼링 앨리', '동양의 베르됭' 전투로 불리어
8군사령관 워커 장군은 인천상륙작전 성공을 위하여 모루 역할을 하게 될 낙동강 방어선 사수의 중요성을 확고히 견지하였다. 그는 예하 지휘관들에게 "적이 대구 시내로 쳐들어 온다면 나는 거리에서 장병들과 함께 싸울 것이니 귀관도 나처럼 최후의 결전을 준비하도록 하게" "나는 귀관을 전선 후방에서 더 이상 만나고 싶지 않네. 관속에 들어가 있다면 별 문제이지만"이라고 대구 사수의 의지를 확고히 하였다.
마이켈리스 연대장은 낙동강 방어선 전투시 결정적 공헌을 한 지휘관이었다. 그는 호남을 우회한 북한군 6사단이 마산 정면에 나타났을 때 연대본부가 있던 진동국민학교가 습격을 받았다. 그는 북한군의 집중포화 속에서도 태연히 학교 운동장에 나가서 우왕좌왕하는 병사들을 진정시키고 오히려 북한군이 점령하고 있던 고지를 공격하라고 명령하였다. 이 전투에서 북한 6사단은 600명의 전사자를 남기고 퇴각하였다. 미 25사단 27연대는 마산 방어 임무를 위해 긴급 투입되었던 킨 특수임무부대의 활동을 보장하였다.
다부동이 위기에 봉착하자 워커는 미 27연대를 투입하였다. 27연대의 전차가 투입되어 북한군 전차를 격파했다. 그래서 다부동에 이르는 5번 도로를 전차 포탄이 적전차를 격파하는 모습이 볼링장의 핀이 쓰러지는 모습과 같다고 하여 '볼링 앨리'라 불렀다. 치열도 면에서는 1차대전 당시의 인명 손실이 가장 컸던 베르됭 전투 이름을 따서 '동양의 베르됭'이라고도 불렀다. 결정적 역할을 한 27연대장이 마이켈리스였다. 그는 47-49년도 아이크의 보좌관을 지냈고 연대장 부임 직전에는 동경 맥아더 사령부 작전참모부 작전참모 보좌관을 거쳤다.
◆다부동 전투의 유공 지휘관은 워커 장군, 백선엽 장군 그리고 마이켈리스 대령
마산 위기나 영천 전투처럼 유엔군이 허를 찔려 낙동강 방어선이 위기에 빠진 경우는 있었으나 북한군이 작정하고 병력을 집중한 주공을 격퇴한 전투는 다부동 전투가 처음이었다. 이는 개전이래 북한군 주력이 패배한 첫 사례였다.
대구 20일간의 혈전으로 다부동 방어선을 지켜내어 북한군을 격멸하여 대구점령을 목표로 한 북한군이 8월 공세는 좌절되고 말았다. 이를 지켜낸 것은 국군장병들과 유엔군들이었지만 그들을 지휘한 워커 장군, 백선엽 장군, 마이켈리스 대령의 동상이 들어서는게 더 타당하다고 본다. 그것은 다부동 전투 기념관의 형상만큼이나 중요한 상징성 때문이다.
한국전략문제연구소장 주 은 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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