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야고부] 빌려 가지 않은 책

김태진 논설위원
김태진 논설위원

한 대학교수가 퇴임을 앞두고 가장 해결하기 어려웠던 것은 연구 도서를 비롯한 책을 정리하는 과정이었다고 한다. 자신이 평생 연구하고 가까이했던 책이건만 누구도, 제자들마저 관심을 두지 않더라는 것이었다. 책을 탐내는 마음은 고맙기까지 했다. 애지중지하던 자신의 마음과 책의 가치를 인정받는 느낌이 들었다는 것이다.

화끈하게 고물상에 팔아 버리려 했던 또 다른 교수도 마찬가지였다. 살아온 생을 부정당하는 느낌이 들어 팔려던 마음을 접었다고 했다. 수많은 학자들이 오랜 기간 누적해 온 지성의 합심은 온데간데없었다. 책은 그가 철석같이 믿고 있던 고유의 가치로 환산되지 못했다. 무게와 재활용 여부만 저울질됐다. 인쇄되기까지 수없이 망설여졌을 글자와 기호, 행간의 의미들은 말끔히 지워지고 종이의 가치로만 측정된 터였다.

지난달 울산대가 장서 94만여 권 중 절반에 가까운 45만 권 폐기를 추진했다. 폐기 대상은 단행본 33만여 권, 참고 도서 2만여 권, 저널·논문집 9만여 권 등이었다. 학술적 가치가 있음에도 장기간 빌려 보지 않은 책들이 포함됐다. 디지털 시대에 종이책을 보지 않는 추세가 감안된 결정으로 풀이됐다. 전국의 대학 도서관이 폐기한 책은 매년 느는 추세라고 한다.

공공도서관들이 이용자들의 관심을 환기하기 위해 여러 소재로 북큐레이션을 진행한다. '빌려 가지 않은 책'도 소재 중 하나다. 저자를 무안 주려는 저격성 이벤트가 결코 아니다. '이런 책이 있었는데 미처 발견하지 못했다'는 호기심을 일깨우고 첫 대출자가 되고 싶은 그들의 욕구를 자극하려는 의도다. 아무도 안 빌려 본 책이니 대출하고 반납하지 않아도 된다는 뜻은 더더욱 아니다.

2년 동안 여덟 곳의 도서관을 돌며 1천500권의 책을 훔친 40대 남성이 최근 광주에서 붙잡혔다. 대출 후 오랜 기간 반납하지 않은 게 화근이었다. 공유가 기본인 도서관에서 장기 연체자는 시쳇말로 '진상 손님'이나 마찬가지다. 책을 빌릴 수 없게 되자 그는 표지에 붙은 도난 방지용 전자태그를 뜯어 내고 독점하는 방식을 택했다. "독서를 하면 평온하다. 단지 책을 읽고 싶어서 훔쳤다"고 범행을 시인했다지만 소유욕이 진하게 드러나는 절도 행위임은 부정할 수 없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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