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김용삼의 근대사] 정조(正祖)가 조선 르네상스 이끈 계몽 군주?

계몽 군주, 근대화의 문을 연 군주로 추앙받는 정조의 어진(초상화).
계몽 군주, 근대화의 문을 연 군주로 추앙받는 정조의 어진(초상화).

계몽(啓蒙)이란 Enlightenment를 번역한 한자어로, 인간의 어리석음을 깨우친다는 뜻이다. 칸트는 계몽이란 '인간이 스스로의 잘못으로 초래한 미성년 상태에서 벗어나는 것'이라고 해석했다. 계몽을 추구하는 지도자를 뜻하는 계몽 군주란 계몽사상가의 영향을 받아 합리적이고 개혁적인 정치를 추구하는 군주, 근대 시민계급의 확장을 도모한 군주로 해석된다.

일부 한국의 사학자들이 18세기 조선의 황금기, 르네상스를 이끈 계몽 군주, 근대국가의 여명을 준비한 임금이라고 극찬한 인물이 조선의 22대 국왕 정조(正祖)다. 그런데 이런 주장들과는 달리 역사적 사실을 추적해 보면 정조는 극단적인 보수 반동주의자였다. 그 몇 가지 증거를 제시한다.

정조는 탕평책을 앞세워 붕당을 혁파한 후 무소불위의 절대군주로 군림했다. 신하들이 자신의 통치행위에 대해 이런저런 문제를 제기하면 정조는 금령(禁令)을 반포하여 입에 재갈을 물렸다. 신하들 의견이 아무리 지당하고 타당해도 금령 위반으로 가차 없이 처벌했다.

정조는 스스로를 군사(君師), 혹은 성인(聖人)을 자처했다. 이것으로도 만족하지 못해 '만천명월주인옹자서(萬川明月主人翁自序, 만 갈래 강을 비추는 달의 주인 되는 늙은이란 뜻)'라는 글을 지어 자신이 태극이자 조화옹(造化翁, 태초에 우주의 만물을 만든 신이란 뜻)으로서 하늘(天) 또는 상제(上帝)라고 주장했다(김성윤, 「영·정조 시대(18세기)는 한국사의 르네상스였는가」, 일조각, 『한국사 시민강좌』, Vol. 40, 2007).

절대군주로서의 위상을 정립한 정조는 죽기 직전 자기 아들(순조)의 안정적 통치를 위해 안동 김씨의 유력 가문 김조순의 딸을 세자빈으로 간택한다. 그 결과 조선 후기를 말아먹은 안동 김씨 세도정치의 문을 활짝 열어젖혔다.

정조대왕함으로 명명된 8,200톤급 첨단 이지스함.
정조대왕함으로 명명된 8,200톤급 첨단 이지스함.

◆서양 서적 불태워라

정조는 취임 초에는 중국을 통해 서학 등 신학문 서적을 열심히 수입했다. 청나라로부터 '사고전서(四庫全書)』의 저본인 『고금도서집성(古今圖書集成)' 5,022권을 사 온 것이 그 대표적인 사례다. 그런데 서학이 점차 확산되자 정조는 1786년 정월, "앞으로 중국으로부터 요망한 서양 서적 수입을 금하고 중국인과 학문 교류도 금지하라"는 어명을 내렸다.

이로 인해 중국 학자들과 개인적인 왕래 금지는 물론 필담까지 금했으며, 선물 및 편지 왕래까지 차단했다. 만약 사신으로 중국에 파견되어 이런 일을 하다 적발되면 조선으로 압송하여 곤장을 치고, 상관까지 연좌를 적용해 처벌하도록 법규를 강화했다.

1791년 11월 12일 홍문관 관리 윤광보가 "홍문관에 보관 중인 서양 책들을 큰 거리에서 태워버려야 한다"라는 극단적인 상소를 올렸다. 정조는 기다렸다는 듯이 "멀리까지 내갈 것도 없다. 즉시 홍문관에서 태워버려라"라고 어명을 내렸다. 그 결과 궁중 도서관에 소장돼 있던 서양 서적이 모조리 불타 없어졌다(노대환, 「정조와 서학」, 2017년도 장서각 아카데미 왕실 문화강좌). 조선판 분서갱유가 조선 르네상스를 이끈 계몽 군주에 의해 자행된 것이다.

1791년 12월 강화의 외규장각에 소장되어 있던 서양 서적 중 정조의 소각 명령으로 인해 불타 없어진 서학서는 총 27종이다. 학자들의 연구에 의하면 17~18세기 조선에 유입된 서학 서적은 180여 종에 이른다. 그런데 1908년 작성된 홍문관의 도서 목록에 서학서 이름이 한 건도 발견되지 않는다. 홍문관에 소장되어 있던 서학 서적을 정조가 모두 불태워버렸기 때문이다(노대환, 「정조와 서학」, 2017년도 장서각 아카데미 왕실 문화강좌).

내친김에 정조는 요망한 이단 서적을 수입하는 자들을 발본색원하겠다고 나섰다. 서양 서적 수입 금지에 실패한 의주 부윤을 처벌하는 규정을 새로 제정했고, 성리학 기강을 문란케 하는 서적을 모조리 퇴출시켰다.

축성술의 극치로 알려진 수원 화성.
축성술의 극치로 알려진 수원 화성.

◆화성 건설하다 거지 된 조선

정조가 수원에 새로 건설한 화성은 축성술의 극치요, 축성 작업에 기중기와 도르래를 사용함으로써 근대 문명 도입의 상징으로 회자된다. 화성 건설에는 총 80만 냥의 비용이 투입되었다. 쌀로 환산하면 17만 5,000석이다, 이 비용은 호조의 1년 경비 13만 5,000석보다 훨씬 많은 금액이다. 화성 건설 덕분에 왕조의 국고가 고갈되어 이후 조선왕조는 깡통 찬 거지 신세가 되었다.

그렇다면 막대한 자금을 투입하여 건설한 화성은 대체 무슨 용도였을까? 당시 시대는 임진왜란 때처럼 적들이 부산에 상륙하여 서울까지 밀고 올라오는 중세가 아니라, 배를 타고 수도 서울로 들이닥치는 근대의 여명기였다. 정조가 근대 문명이나 전략 전술에 티끌만 한 상식이라도 있었다면 외적의 침략에 대비하기 위해 수원이 아니라 강화 일대에 성을 쌓았어야 한다.

게다가 정조 재임기는 나폴레옹 전성기와 활동 시기가 겹친다. 당시 유럽에선 대포의 위력과 기동력을 앞세운 나폴레옹의 근대 육군 덕분에 성채는 전술 전략적 가치를 완전히 상실했다. 이런 시기에 시대착오적인 화성 건설은 외적 방어용이 아니라 국왕의 권위를 높이고, 자신의 재임기가 태평성대임을 알리는 상징 조작용이었다.

정조는 궁술에 관한 한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명사수였다. 50발 연속 활쏘기 때 모두 명중시키고 마지막 한 발을 일부러 빗맞힐 정도의 신궁 수준이었다고 한다. 그러한 명사수가 궁술에는 지대한 관심을 가졌으면서 조총·대포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그 결과 정조 사후 70년이 못 돼 병인양요·신미양요의 치욕을 경험하게 된다.

일본은 임진왜란 때 포로로 잡아간 조선 도공들이 만든 채색 도자기를 유럽에 수출하여 막대한 부를 축적했고, 이 자금을 근대화에 투입했다. 말하자면 일본 근대화는 조선 도공이 제작한 도자기 덕분에 가능했다고 볼 수도 있다.

비슷한 시기인 1795년 8월 6일, 도자기 만드는 분원에서 국왕 정조에게 "기묘하게 기교를 부려 제작한 것들이 있다"라고 보고했다. 정조는 "쓸데없고 긴요하지 않은 것은 일체 만들지 못하도록 엄금하라"는 어명을 내렸다. 조선 도공들은 도자기 수출은 고사하고 관청 납품용 도자기만 만들도록 강요당한 것이다. 이로써 조선의 도자기 산업은 초토화되었다.

우리는 이런 시대착오적 인물을 계몽 군주로 추앙하며 국운을 가름할 전략무기인 8,200톤급 첨단 이지스함에 '정조대왕함'이란 이름을 부여하여 열심히 떠받들고 있다. (김용삼 펜앤드마이크 대기자)

일본 채색 도자기의 신세계를 개척한 조선 도공 이삼평을 기리는 비석.
일본 채색 도자기의 신세계를 개척한 조선 도공 이삼평을 기리는 비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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