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시인이 들려주는 클래식] <43>쇼팽의 ‘겨울바람’ op. 25-11

서영처 계명대 타불라라사 칼리지 교수

겨울바람 이미지. 클립아트코리아
겨울바람 이미지. 클립아트코리아

차가운 바람이 바닥을 쓸며 분다. 본격적인 겨울이 시작되고 있다. 겨울바람은 초속 10m 이상의 된바람이다. 아스팔트 가에 소복이 모여있던 낙엽이 쥐 떼처럼 털을 곧추세우고 빠른 속도로 나를 향해 질주해 오는 것 같다.

쇼팽(Fryderyk Franciszek Chopin, 1810-1849)을 피아노의 시인이라고 한다. 오로지 피아노에만 집중했기 때문에 얻은 별칭이다. 쇼팽이라고 하면 흔히 센티멘탈하고 몽상적이며 사교적인 음악, 또는 다소 치우친 감상 속으로 이끌어 가는 음악이라는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나도 한때 그렇게 생각했다. 심지어 독일의 작가 토마스 만은 요양원을 배경으로 하는 '트리스탄'이라는 작품에서 얼치기 작가의 간청에 못이겨 쇼팽의 '녹턴'과 바그너의 '트리스탄과 이졸데' 사랑의 모티프를 잇달아 연주하고 기진맥진해 쓰러지는 젊고 예술성이 풍부한 한 여성의 이야기를 다룬다. 자신을 트리스탄과 동일시하는 작가의 환상대로, 걷잡을 수 없는 정열과 상승하는 음들이 엎치락뒤치락하며 절정에 이르렀다가 다시 가라앉는 격정을 연주하며 남은 에너지를 다 소진한 여인은 이졸데처럼 죽어간다.

쇼팽의 음악은 낭만주의의 전형을 보여준다. 보석처럼 반짝거리는 수많은 장식음과 감미롭고 세련되며 섬세하고 여성적인 경향은 무뎌 있던 감성을 자극한다. 쇼팽 당대에도 지성이나 형식미보다는 감각을 숭배하는 음악이며 건축성이 부재하다는 비판을 받았다. 키신이나 조성진, 임윤찬의 쇼팽 연주는 한음, 한음에 극도로 집중한, 논리와 이성, 감성이 완벽하게 결합된 음악을 들려준다. 그러기에 쇼팽에 대한 선입견은 무리가 아닌 것 같다. 쇼팽을 연주하기 위해서는 이런 에너지들을 충분히 내장하고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쇼팽이 연주자의 역량에 따라 변질되기 쉬운 작품이라는 의미이기도 하다.

쇼팽의 강력한 지지자 중에는 앙드레 지드가 있다. 지드는 바그너의 '엄청난 중량감'과 파토스의 대척점에 있는 쇼팽을 '가장 순수한 음악'이라고 했다. 어떤 이념이나 가치를 배제하고 음악 자체에 집중하며 음 하나하나에 '책임감을 실었다'는 뜻이다. 심지어 지드는 쇼팽의 음악을 시인 보들레르의 '악의 꽃'에 비유하기도 했다. 어쩌면 쇼팽의 곡은 완성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맨 처음 연주하는 것처럼 기대하고 망설이고 두근거리며 발견하고 탐색해 나가야 하는 곡이라 할 수 있다.

겨울바람은 연습곡이다. 이 곡은 고요한 전조가 흐르고 이내 겨울바람처럼 하행하는 격렬한 리듬이 몰아친다. 귀 기울여 들으면 바람은 온몸으로 파고들어 혹독한 겨울 한기를 실감시킨다. 그것은 시베리아에서 불어오는 북풍이기도 하지만 내면에서 불어오는 바람이기도 하다. 젊은 날 인생의 변곡점에서 이 곡을 들으며 한기를 느꼈다. 학생이 연주하는 곡이었지만 닥쳐올 날을 예고하는 것처럼 가슴 깊이 파고들었다. 그 후 어떤 대가의 연주를 들어도 그만큼의 감동은 얻지 못했다. 음악은 어떤 시간과 장소에 놓여있는지에 따라 다르게 들리기도 한다.

많이 본 뉴스

일간
주간
월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