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산에 나무들은 잎을 대부분 떨어트리고 회색 가지들이 돋보이는 계절이다. 불과 얼마 전만 해도 푸르고 붉어서 선명한 유화 같았는데 이제 옅은 수묵담채화가 되었다. 간간히 남은 초록색이 흑백이 아니라는 것을 알려준다. 겨울에도 푸른빛을 유지하는 나무들 덕분이다.
늘 푸른 잎을 달고 있다고 해서 우리는 그들을 상록수라 부른다. 상록수는 잎의 모양에 따라 크게 두 부류로 나눈다. 하나는 상록활엽수로 잎이 넓다. 몇몇 종을 제외하고는 주로 남부 섬지방이나 해안가를 중심으로 자란다. 다른 하나는 상록침엽수로 가늘고 뾰족한 잎을 가졌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소나무와 잣나무가 그 대표적인 예이다. 침엽수는 전국의 산지에서 만날 수 있다. 겨울 팔공산의 짙푸른 나무들도 다 침엽수이다.
상록수가 겨울에도 푸른 잎을 가지고 있다고 해서 단풍이 들지 않는 것은 아니다. 그들도 단풍이 들고 잎이 떨어진다. 다만 봄에 돋은 잎이 그해 가을에 떨어지지 않고 해를 넘긴다. 그 덕분에 겨울에도 푸른 잎을 볼 수 있는 것이다. 소나무숲 바닥에 연한 갈색으로 수북하게 쌓인 바늘같은 잎들이 그렇게 두 해 만에 떨어진 잎들이다. 그 푹신한 융단 위를 걸으면 활엽수 낙엽 위를 걸을 때와는 사뭇 다르다. 소란스럽지 않다. 그들은 바스락거리는 소리조차 나지 않도록 숨을 죽이고서 자신의 푸른 잎들을 우러러보며 누구의 발길이라도 반겨 맞이한다.


◆우리나라 국가대표 침엽수, 소나무
나무를 잘 모르는 사람도 나무이름 몇 개만 대보라고 하면 어김없이 등장하는 나무가 바로 소나무이다. 그만큼 정서적으로 우리와 가까운 나무이다. 시골의 야트막한 야산 등성이나 볕이 잘 드는 사면에는 군집을 이루어 산다. 안 보려 해도 안 볼 수 없는 나무가 소나무이다.
이불을 기우면 좋을 것 같은 기다란 바늘잎은 딱 두 장이 함께한다. 그 잎들이 아주 촘촘하게 달린다. 추석날 송편을 찔 때, 잘 빚은 예쁜 떡 한 켜마다 솔잎 한 켜를 깔고 또 떡을 올려서 쪘다. 요즘은 다들 떡집에서 사서 먹지만 불과 수십 년 전만 해도 집집마다 송편을 만들었다. 그 시절 산에서 솔잎을 딸 때는 잎이 두 장인 것만 골라서 따야 했다.
세 장인 잎은 리기다소나무로, 우리나라 토종 소나무가 아니라 북아메리카에서 도입된 나무이기 때문이다. 잎도 훨씬 억세고 솔방울도 더 거칠다. 두 장인 잎을 찾아 소쿠리를 들고 이 나무 저 나무 살피던 그 기억이 이제는 추억 속에 저장되어 있다. 가을을 지나 겨울에도 싱그러움을 전하는 소나무는 누가 뭐래도 우니라나 침엽수의 대표선수이다.

◆청설모에게 혼나보셨나요? 잣나무
잣나무도 소나무 못지않게 친숙한 나무다. 아주 비슷하게 생겨서 구분하기 어렵다. 그래서 잣나무를 먼빛으로 보고 소나무라고 하는 사람들도 많다. 잣나무는 일단 잎이 다섯 개다. 그게 가장 큰 차이지만 잎의 색깔 또한 소나무와 조금 다르다. 잎 뒷면에 흰색이 돌아서 전반적으로 분빛이 돈다. 잣나무도 소나무와 같은 과(科)이기 때문에 열매의 모양이 비슷하다.
솔방울보다 현저하게 큰 잣방울이 달린다. 열매에는 작은 방마다 식재료로 쓰이는 잣이 숨어 있다. 그러나 그 잣을 사람들만 좋아할까. 청설모도 잣을 아주 좋아한다. 잣나무숲에서는 청설모가 잣을 따는 모습을 더러 볼 수 있다. 가끔은 실수로 숲 바닥에 떨어트리기도 하는데, 잣이 잔뜩 들어 있는 그런 잣방울을 줍는 사람은 횡재다.
고생해서 딴 먹이를 빼앗긴 청설모는 소리를 지르고 왔다갔다하며 화를 낸다. 청설모로서는 화내는 것이 당연하다. 어쩌다 산길에서 속이 꽉 찬 잣방울을 만나면 누가 주인인지 한번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그래도 갖고 싶다면 청설모에게 혼날 각오는 좀 하는 것이 좋겠다.

◆코뚜레에서 화장수로, 노간주나무
노간주나무는 특이하게 생긴 나무이다. 수형이 긴 원통모양이면서 위로 갈수록 점점 좁아져서 뾰족해진다. 주위에 방해가 되는 다른 나무가 없을 때 더욱 그렇다. 노간주나무는 석회암지역을 좋아해서 대구 경북 지역에 흔하게 자란다. 아주 짧은 바늘잎을 가진 노간주나무는 예전에 경상도 지역에서 주로 송아지의 코뚜레를 만들던 나무이다. 질기면서 잘 휘어지고 물에 잘 썩지도 않아서 코뚜레로 안성맞춤이었다. 지역에 따라 다래나 물푸레나무를 활용하기도 했다.
대부분의 상록수가 그렇지만 노간주나무는 특히 향기가 독특한 나무이다. 열매에서 나는 향기는 사람을 홀릴 정도로 매력적이다. 서양에서는 같은 속(Juniperus)에 속하는 유사한 나무의 열매로 술의 한 종류인 Gin의 재료로 쓰기도 했고, 요즘은 우리나라에서도 '주니퍼베리'라고 부르면서 약용이나 화장수로 많이 이용된다. 우리나라가 발전함에 따라 노간주나무도 코뚜레에서 화장수로 꽤 세련되게 발전했다.


◆겨울에 드러내는 존재감, 개비자나무
개비자나무가 드러나는 계절이다. 소나무나 잣나무처럼 키가 크면 여름에도 다른 나무들 사이에서 존재를 드러낼 수 있겠지만 개비자나무는 그렇지 못하다. 관목형태로 키가 커봐야 3∼4미터 정도이다. 여름 동안 짙푸른 다른 나무들의 그늘에 가려져서 딱히 눈에 띄지 않는다. 낙엽이 떨어져 바스락거릴 때 팔공산에 개비자나무가 잘 보이기 시작한다. 치산계곡을 따라 진불암으로 올라가는 등산로 주변에서 눈길을 조금만 숲으로 돌리면 어렵지 않게 만날 수 있다.
개비자나무는 잎이 아주 재밌게 생겼다. 새의 깃털모양으로, 줄기를 중심에 두고 양쪽으로 짧은 잎들이 아주 가지런히 나열된다. 잎이 부드러워서 만져도 찌르지 않는다. 봄에 꽃이 필 때는 수꽃은 도드라지고 암꽃은 그다지 드러나지 않는다. 열매는 늦여름 또는 초가을에 붉게 익는데, 소나무나 잣나무와 마찬가지로 두 해에 걸쳐 성숙한다. 제주도 등 남쪽 해안지방에 자라는 비자나무보다 몸집이 작다고 해서 그 매력마저 적을까. 겨울산에서 한껏 존재감을 드러내는 나무가 개비자나무이다.


◆천연기념물 대구 도동 측백나무 숲
몇 년 전 국립수목원 산책을 하다가 어느 숲해설가가 하는 이야기를 스쳐 지나가면서 들은 적이 있다. 천연기념물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었는데 어떤 참가자가 질문을 했다. 천연기념물 1호는 뭐냐고. 해설가는 모른다고 했다. 그때 그들과 상관없는 나는 대답을 할 뻔했다. 천연기념물 1호는 대구 도동의 측백나무 숲이라고 말이다. 그 후 2022년부터 국보, 보물 등과 함께 지정번호가 폐지되었다. 행정상 처리하기 편리하도록 지정 순서에 따라 번호를 붙였는데, 국민들이 그 번호에 의미를 크게 두는 경향이 있어서 폐지했다고 한다. 그래서 지금은 숫자를 빼고"천연기념물 대구 도동 측백나무 숲"이다.
측백나무는 침엽수라고는 하지만 비늘잎이다. 비늘모양으로 켜켜히 쌓인 듯이 잎이 나열된다. 그래서 만져도 아프지 않다. 석회암지역 지표식물로 주로 석회암 절벽에 붙어 자란다. 대구 도동도 마찬가지다. 석회암 절벽에 빽빽하게 붙어서 겨울에도 짱짱하게 푸른색을 유지하며 살아간다. 비록 1호라는 숫자의 의미는 폐지됐다고 하지만 우리나라에 자생하는 측백나무 숲으로서 단연 1등인 것은 변함이 없다.

글 산들꽃사우회 (대표집필 김영희작가)·사진 = 산들꽃사우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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