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사고 내도 집으로 튀면 된다? 음주운전 의심사고에 경찰 "우리도 답답"

아파트 지하주차장 15대 들이받은 남성, 이틀만에 연락 닿아
유사사건 음주운전 혐의 무죄 판결 많아
강제수사 시 증거능력 없어져 오히려 문제 되기도
"판례 흐름은 헌법상 주거권, 영장주의 중시 추세"
사고 전 행적 못 밝히면 다른 혐의만 적용될 듯

29일 오전 0시 37분쯤 대구 북구의 한 아파트 지하주차장에서 차량 1대가 주차돼 있던 차량 15대를 들이박는 사고가 발생했다. 매일신문DB
29일 오전 0시 37분쯤 대구 북구의 한 아파트 지하주차장에서 차량 1대가 주차돼 있던 차량 15대를 들이박는 사고가 발생했다. 매일신문DB

지난 29일 대구 한 아파트 지하주차장에서 차량 15대를 들이받고 잠적한 남성(매일신문 11월 29일)이 30일 오후에야 연락이 닿았다. 음주측정이 사실상 무산되면서 유사사건 강제수사 방안에 대한 수사기관의 고심이 깊다. 법원에서는 비슷한 사건에서 음주운전 혐의에 대해 무죄를 선고하는 사례도 많은 것으로 나타났다.

◆운전자 장시간 연락두절

30일 오후 대구 북부경찰서에 따르면 A씨는 전날 오전 10시쯤 경찰과 잠깐 전화 통화를 한 뒤 사고 약 40시간만인 이날 오후에야 연락이 닿았다. 지난 29일 통화 당시 경찰은 A씨에게 수사를 받으러 올 것을 요구했고, A씨는 정확한 답변을 피한 것으로 알려졌다.

경찰도 즉시 강제수사로 전환할 수는 없었다. 북부경찰서 관계자는 "사건이 일어난 뒤 약 40분 후 신고가 이뤄졌고 교통사고 자체는 강력범죄가 아닌 탓에 현행범으로 체포할 수는 없었다"고 설명했다. 경찰은 사고 당일 A씨의 행적을 찾아 도로교통법상 음주운전, 사고후미조치 혐의 적용 여부를 결정할 방침이다.

비슷한 상황이 반복되지만 일선 경찰 대부분 '답답하지만 어쩔 수 없다'는 반응이다. 대구 한 경찰서 교통안전계장은 "음주측정을 거부하고 도망가는 사람은 현행범이기에 바로 쫓아가 체포할 수 있지만, 운전을 마친 시각과 측정 사이에 음주를 했을 가능성이 있기에 이런 상황에서는 운전자를 강제로 체포할 수 없다"고 했다.

또 다른 경찰서 교통안전계장은 "현장에서 용의자를 특정하는 것 자체가 어렵고 무리하게 증거를 확보하려다보면 법정에서 증거능력을 상실하는 경우가 많아 처리가 난해하다"고 토로했다.

◆유사사건 무죄 판결 잇따라

경찰의 설명이 답답해 보일 수 있지만, 관련 판례를 살펴봐도 음주운전이 강하게 의심되는 피의자가 무죄를 선고받는 경우가 흔하다.

지난해 5월 대구지법에서는 대구 달서구에서 만취상태로 이륜차를 운전해 1심에서 벌금형을 선고 받은 40대 남성 B씨가 항소심에서 무죄를 선고 받았다.

B씨는 2020년 8월 3일 오전 4시 30분쯤 음주운전 의심신고를 받은 경찰은 4시 36분쯤 B씨의 집을 찾아가 측정을 요구했으나 응하지 않았다. 경찰은 같은 날 오전 6시 30분쯤 재차 B씨를 찾아 음주측정을 요구했고, B씨는 음주운전을 시인하고 측정에 응했다. 측정기를 통한 혈중알코올농도는 0.148%, 채혈측정으로 나온 수치는 0.202%로 면허 취소 수치의 두배가 넘었다.

1심 법원은 B씨의 음주운전 혐의를 유죄로 보고 벌금 700만원을 선고했으나 항소심 재판부는 경찰관들이라 해도 거주자의 명시적 허락 없이 집안에 들어간 것은 위법하다며 무죄를 선고했다.

약 2년 전 성주에서 음주운전 의심신고를 받고 집으로 출동한 경찰의 측정에 불응한 50대 C씨가 2심에서 무죄를 선고 받은 사건도 살펴볼만 하다. 1심 법원은 C씨의 혐의를 유죄로 판단하고 지난해 10월 벌금 700만원을 선고했으나, 지난 8월 항소심 법원은 "피고인을 현행범으로 체포한 것도, 피고인의 주거지에 대한 수색영장 등을 발부받은 것도 아닌 상황"이라며 "집까지 찾아가 음주측정 요구하는 등 강제수사 나선 것은 위법하다"며 무죄를 선고했다.

B씨 사건은 검찰의 상고를 대법원이 기각, C씨 사건은 검찰이 상고를 포기하면서 모두 무죄가 확정됐다.

◆헌법상 주거권, 영장주의 중시 추세

법률가들은 이번 사건 역시 마찬가지로 사고후미조치, 비산물불제거죄, 인적사항미제공죄 등을 적용할 수 있을 뿐, 사고 전 행적을 명확히 밝혀내지 못하는 이상 음주운전 혐의를 적용하긴 어려울 것으로 본다.

천주현 형사전문변호사는 "판례의 흐름은 도로교통법의 보호법익보다 헌법상 주거권, 사생활권, 영장주의 등을 우위에 두고 있는 추세다"며 "옛 군사정권,독재정권 당시 불법수사나 인권침해 사례가 많다보니 이런 장치를 둔 것인데, 도망간 진범 몇을 더 잡는 것보다 광범위하고 과도한 위법수사가 이뤄질 가능성을 차단하는 차원"이라고 설명했다.

이어 "과거 유명 방송인이 비슷한 사고를 낸 적이 있고, 큰 반향과 함께 모방범죄가 줄을 잇는 문제도 있었다"며 "여러 정황상 합리적으로 고도의 의심이 들 때, 처벌할 수 있는 규정을 만들 순 있겠지만 이건 입법의 영역이고, 이번 사건의 경우 사고후미조치(비산물불제거죄, 인적사항미제공죄) 혐의를 검토해야 할 것"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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