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청라언덕] 내 말에 속지 말라 나는 거짓말만 한다

성철 스님. KBS 1TV 화면 캡처
성철 스님. KBS 1TV 화면 캡처
황희진 디지털국 기자
황희진 디지털국 기자

"생사가 없다 하나 생사 없는 곳이 없구나. 더 이상 구할 것이 없으니 인연 또한 사라지는구나." 11월 29일 입적(사망)한 자승 스님이 남긴 열반송이다. 열반송은 스님이 입적에 앞서 수행을 통해 얻은 깨달음을 후인들에게 전하기 위해 남기는 말 또는 글이다.

자승 스님이 두 차례 총무원장을 맡은 조계종은 종헌에서 대승불교를 추구하고 있다. 대승불교는 자기 해탈에 더해 중생 구제도 목적으로 하니, 자승 스님의 마지막 메시지도 분명 속세를 가리켰을 것이다.

조계종의 큰 자리에 있는 스님들의 말에는 '시대를 의식했느냐'는 질문이 붙기 마련이다. 성철 스님이 1981년 조계종 종정이 된 직후 남긴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로다"에 대해서도 물음표가 향했다. 1980년 한국 사회에서는 신군부가 시민들을 탄압한 5·18 민주화운동이, 같은 해 불교계에서는 역시 신군부가 한국 불교를 탄압한 10·27 법난이 발생했는데, 이걸 꼬집거나 대응한 뉘앙스가 아니라며 비판이 따랐다.

그때 승려 하나가 한마디한들 당장 뭐가 달라졌을까. 시간이 흘러 민주화는 항쟁의 소재에서 대한민국 체제의 근간이 됐다. 모래처럼 흩어지지 않고 융기하는 산의 모습이었고, 막을 수 없는 물의 흐름이었다.

성철 스님의 또 다른 유명한 말은 1981년 인터뷰를 하러 온 한 기자가 "1천300만 불자들에게 한말씀해 주시라"고 요청하자 "나는 순 거짓말만 하고 사는 사람이니, 내 말에 속지 말라"며 손사래를 친 것이다.

부처의 '자등명 법등명'과 닮은 말이라는 해석이 나왔다. '자기 자신을 등불로 삼아 의지하고, 법을 등불로 삼아 의지하라'는 뜻. 기자가 단 한 사람(성철 스님)의 말 한마디가 1천300만의 행동, 정신, 삶을 좌우할 수 있다는 뉘앙스로 마이크를 들이밀었으니, 경계한 맥락이 아닐까.

여기에 주석으로 달 만한 말이 3년 뒤 예술계에서 나왔다. 백남준은 1984년 미국에서 세계 최초의 인공위성을 통한 생중계 쇼 '굿모닝 미스터 오웰'을 기획한 후 찬사를 받곤 귀국해 가진 인터뷰에서 "원래 예술이란 게 반이 사기이다. 속이고 속는 것이다. 사기 중에서도 고등 사기이다. 대중을 얼떨떨하게 만드는 게 예술이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이런 속이고 속는 행위를 크게 경계하는 분야가 바로 선거다.

선거는 대개 봄에 치르고, 그래서 직전 해 12월은 본격적으로 선거 시즌이 시작되는 시기인데, 이때부터 정치꾼들의 사기도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그걸 잡아내는 임무를 맡은 게 선거관리위원회인데, 2020년대 들어 대선 소쿠리 투표 사태와 간부 자녀 특혜 채용 논란 등을 일으키며 신뢰가 추락하고 있어 유권자 스스로 '자등명'에 더 힘써야 하는 상황이다.

사실 법과 제도로 적발할 수 있는 것 말고 은유적 의미의 사기는 일부 후보자가 다수 유권자에게 늘 던져 왔다. 후보자에 대한 공약 평가, 연임을 노리는 후보자에 대한 공약 이행 평가가 반복되지만, 그럼에도 속고 또 속는 유권자가 적잖다. 자기가 한 말 중 거짓말이 있었다고 양심 고백을 하는 정치인은 없다고 봐도 무방하고, 반대로 '대중을 얼떨떨하게 만들려는' 쇼에 치중하는 정치인은 꽤 돼 보인다.

그러니 유권자의 노력만큼, '무소유'로 유명한 법정 스님이 입적 전날 한 "이제 시간과 공간을 버려야겠다"는 말을 정치인들에게 교훈으로 던질 필요가 있다. 정치할 소양과 능력이 없는 정치인은 알아서 정치할 시간과 공간을 버리는, 즉 정치계에서 입적(은퇴)하는 결단을 내리는 게, 정체하다 못 해 퇴보할 위기인 한국 정치엔 소신공양, 스스로에겐 자기 해탈, 유권자에겐 중생 구제가 될 것이다.

많이 본 뉴스

일간
주간
월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