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문학 속 호모에스테티쿠스] <23> 슐링크의 ‘책 읽어주는 남자’: 낭독의 에로스

이경규 계명대 교수

책 읽어주는 남자 이미지. 게티이미지뱅크.
책 읽어주는 남자 이미지. 게티이미지뱅크.
이경규 계명대 교수
이경규 계명대 교수

3장으로 된 이 소설의 제1장은 두 남녀의 특이한 연애를 다루고 있다. 30대 중반의 한나와 15세 남고생 미하엘의 비대칭적인 사랑이 서사의 중심을 이룬다. 제2장은 한나가 나치 때 강제수용소 감시원으로 일한 전력이 드러나 재판을 받는 내용이다. 이러한 로맨스와 아우슈비츠의 결합에 대해 홀로코스트 포르노라는 비판도 있다. 그러나 이 소설을 나치 고발문학으로만 보기에는 미학적 측면이 너무 도드라진다.

황달을 앓고 있는 미하엘은 어느 건물 안에서 구토를 하던 중 한나의 도움을 받고 위기를 면한다. 이것이 계기가 돼 두 사람은 잠까지 자는 관계로 발전한다. 미하엘은 수업까지 빼먹으며 20세 연상의 여자에게 빠져든다. 그러나 한나는 미하엘이 수업을 소홀히 하면 안 만나겠다며 한 가지 조건을 내세운다. 그것은 자기와 자기 전에 책을 낭독하는 일이다.

이리하여 두 사람은 기이한 의식을 수행하는데, '낭독-샤워-섹스-잠시 누워있기'가 그것이다. '의식'(Ritual)이라 한 것은 이 과정이 너무나 철저하기 때문이다. 책이 좋으면 직접 읽으면 되지 않느냐는 미하엘의 말에 한나는 '네 목소리가 너무 아름다워서 그렇다'고 대답한다. 이 말에 고무된 미하엘은 독일어 시간에 다루거나 언급된 책을 가져와 큰 소리로 낭독한다. 한나는 최고의 청중이 된다.

웃음, 야유, 외침은 그녀가 얼마나 집중하여 책을 따라오는지 알 수 있었다. 계속 읽으라고 재촉할 때의 초조함은 주인공의 바보 같은 행동이 어서 끝나기를 바라는 간절한 희망이었다. 나로서도 더 읽지 않을 수 없는 경우가 많았다. 해가 긴 날은 오래 낭독하며 저녁까지 한나와 누워있었다. 그녀가 내게 기대어 잠들 때 뜰에 지빠귀의 노래가 들려오고 부엌의 물건들은 잿빛 어스름에 잠겼다. 나는 실로 행복했다.

듣는 한나에게 낭독은 최음제가 되고 읽는 미하엘에게는 진정제가 된다. 가라앉은 미하엘의 욕망은 함께 샤워하면서 다시 고조된다. 그러나 특이한 이 관계는 반년 정도 지나 한나가 흔적 없이 사라지면서 막을 내린다. 그사이 미하엘은 건강을 되찾고 낙제생에서 우등생으로 발전해 있다. 고전 낭독의 효과다. 몇 년 뒤 미하엘은 명문대 법학과에 들어가 공부에 매진한다. 연애도 하지만 마음속에 남아 있는 한나 때문에 번번이 실패한다.

어느 날 미하엘은 재판을 견학하던 중 피고석에 앉아 있는 한나를 보고 소스라치게 놀란다. 나치 때 수용소 감시원이었다는 사실이 드러나 재판을 받고 있다. 그보다 더 놀라운 것은 그리도 똑똑했던 한나가 문맹이었다는 사실이다. 게다가 자신의 문맹을 숨기기 위해 동료 감시원들의 죄까지 뒤집어쓰고 종신형을 감수한다. 미하엘은 이제야 한나의 비밀을 깨닫는다. 그러나 문맹에 대한 부끄러움이 그렇게도 큰 것일까?

한나는 글은 못 배웠지만 어릴 때부터 매우 똑똑했다. 그녀를 문맹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몸으로 하는 일을 찾아 직장에 들어가면 얼마 안 가 사무직으로 승진시켜준다. 그러면 그녀는 홀연히 직장을 떠나 새로운 기능직을 찾는다. 그러나 문맹에 대한 수치심이 두터워지는 만큼 글에 대한 욕망도 강해진다. 글 읽는 소리에 성욕이 발동할 정도다. 그렇게 한나의 에로스는 눈이 아니라 귀를 통한다. 인류사를 보면 독서는 낭독이 주류였고 묵독은 근대 이후의 현상이다. 고도의 묵독 시대에 나온 '책 읽어주는 남자'는 낭독에 대한 비가로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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