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 정치사에 하나의 신화가 있다. 러시아 사회주의 혁명을 블라디미르 레닌과 볼셰비키가 만들어 냈다는 신화다. 이것이 신화인 이유는 러시아 혁명 발발에서 볼셰비키의 역할은 아무것도 없었기 때문이다. 볼셰비키는 차르 체제를 붕괴시킨 인민의 자발적 봉기에 편승했을 뿐이다.
대표적인 예로 1917년 2월 혁명 때 결성돼 10월 혁명을 가능케 한 결정적 요인인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를 들 수 있다. 1980년대 운동권의 '의식화' 필독서이기도 했던 '역사란 무엇인가'의 저자로, 러시아 혁명기에 관한 가장 선도적이고 정확한 연구자로 평가받는 E. H. 카는 이렇게 진단한다. "노동자 대표들의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가 혁명의 순간을 만들어 낸 것은 중앙의 지도력이 부족한 가운데 일어난 노동자 집단의 자발적 행동이었다." 카의 결론은? "차르 독재 타도에 대한 레닌과 볼셰비키의 공헌은 하찮은 것, 볼셰비즘은 비어 있는 왕위를 계승한 것뿐이다."
독일 출신 정치철학자 한나 아렌트도 같은 의견이다. "레닌의 직업 혁명가 정당은 혁명을 '일으킬' 수 없었다. 그들이 취할 수 있었던 최선책은 붕괴가 일어나는 순간 바로 그 주변에 있거나 급히 귀국하는 것이었다."('혁명론') 실제로 그랬다. 2월 혁명이 일어났다는 소식에 레닌은 독일이 제공한 '봉인열차'를 타고 망명지 스위스에서 부랴부랴 러시아로 돌아왔다. 레닌은 혁명이 날 줄도 몰랐다. 2월 혁명을 불과 한 달 앞두고 "우리처럼 나이 든 세대는 곧 닥쳐올 혁명에서 결정적인 전투를 보지 못할지도 모른다"고 한탄했다. 혁명을 예상하지 못했으니 혁명을 일으키지 못하는 것은 당연했다. 아렌트의 결론은? "볼셰비키는 길거리에 방치된 권력을 발견하고 습득했을 뿐이다."
미국 정치학자 제임스 C. 스콧은 이들의 러시아 혁명 연구를 이렇게 요약한다. "혁명 과정에서 레닌이 눈부시게 성공한 점은 일단 기정사실화된 혁명을 손아귀에 넣은 데 있다."('국가처럼 보기, 국가는 왜 계획에 실패하는가')
한국 민주화가 586으로 대표되는 운동권의 공이라는 '도시 전설'도 마찬가지다. 이들이 '운동'을 할 때 이미 한국의 정치 시계는 독재나 권위주의에 머물거나 회귀할 수 없는 시간대에 도달해 있었다. 운동권의 '운동'과 상관없이 한국의 민주화는 '빠꾸'가 불가능한 경로로 '운동'하고 있었다.
586은 이렇게 항변할 것이다. '민주화가 대세라 해도 앞당긴 것은 자신들'이라고. 해괴한 '정신 승리'에 불과하다. 민주화가 대세였던 것은 이 땅의 모든 사람들이 행동했기 때문이다. '민주화'를 연 6·29선언부터 그랬다. '넥타이 부대'를 포함해 공(功)을 챙기려 하지 않았던 수많은 '보통 사람'들이 행동한 결과였다. 그들의 행동이 없었다면 '운동'은 '불임'(不姙)으로 그쳤을 것이다. 제임스 C. 스콧의 표현을 빌리자면, 민주화 과정에서 586이 성공한 점은 기정사실화된 민주화의 공을 독점한 데 있다.
그럼에도 그들은 '민주화 투쟁' 경력을 훈장 삼아 '민주화'가 열어 준 출세의 공간에서 서식하며 제도권 권력의 단물을 배 터지게 빨았다. '민주 대 반민주'라는 철 지난 프레임을 고수하며 자신들은 '민주', 반대쪽은 '반민주'로 매도한다. 입으로는 미제(美帝)를 증오하면서 자식을 미제로 유학시키는 데는 열성이다.
국민은 민주화에서 586에 빚진 게 없다. 있다고 해도 청산된 지 오래다. 때가 됐다. 지금까지 많이 우려먹었다. 그만큼 해 먹었으면 됐다. 이제 내려오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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