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 황제 중에는 여성이 몇 명 있었는데, 그 중 대제로 불리는 유일한 여성이 있었으니 예카테리나 2세이다. 남성 황제 중에도 대제라는 칭호가 붙여진 사람은 표트르 1세뿐이니, 예카테리나 2세는 그만큼 대단한 업적을 남겼다고 볼 수 있다. 역사가들은 크림반도를 합병해 부동항을 확보하고, 정치적으로나 경제적으로 러시아를 유럽에 필적하도록 한 그녀의 공로를 인정하지만, 그녀의 자유분방한 남성 편력도 그냥 넘어가지 않는다. 그녀는 한순간도 남자의 사랑 없이는 지낼 수 없었다는 말을 듣기도 한다. 그녀에 대해 전문적으로 연구한 사람들은 그녀는 적게는 12명에서 많게는 22명의 남자와 연인 관계에 있었다고 한다.
예카테리나 2세는 원래 러시아인이 아니었으며, 지금은 독일에 속하는 프로이센의 가난한 귀족의 장녀로서 이름은 소피였다. 그녀의 어머니였던 조안나는 자기보다 낮은 신분의 남편과 결혼하여 어딜 가나 가난한 친척으로 취급되는 자신의 처지를 벗어나고자 딸을 권력자 가문에 시집 보내려고 했었다. 야심에 찬 소피 어머니의 열망에 하늘이 응답했을까? 소피는 당시 쿠데타로 황제가 됐던 옐리자베타가 후계자로 정한 카를 페터 울리히(미래의 표트르 3세)와 결혼하게 된다. 울리히는 미혼이었던 옐리자베타의 조카이며 소피와는 사촌이기도 하다. 소피는 이 결혼으로 러시아 정교로 개종하고 예카테리나라는 이름을 얻었다.
예카테리나 2세와 표트르 3세의 결혼은 처음부터 재앙이었다. 표트르 3세는 신혼 때부터 예카테리나를 멀리했으며, 8년 동안 이들 사이에는 아이가 없었다. 각자의 혼외관계는 이 둘 사이에서 합의된 것과 마찬가지였다. 예카테리나가 첫아들을 낳았을 때 많은 이들은 아이의 친자 관계에 의문을 품었다. 그리고 그 이후에 낳은 세 명의 자녀도 표트르 3세의 아이가 아닌 것으로 여겨진다.
옐리자베타 황제가 1762년 1월에 사망해 표트르 3세가 왕위를 계승했으나, 그의 정책에 불만을 품은 세력을 등에 업은 예카테리나 2세는 불과 6개월 만에 남편을 퇴위시키고 자신이 황제의 자리에 올랐다. 그녀는 황제가 된 이후에도 많은 남성과 연인 관계에 있었으나, 동시에 여러 명의 남성을 후궁처럼 두지는 않았다. 그리고 관계를 끝낼 때는 충분히 보상했으며, 그럴 때마다 상대 남성에게 작위와 함께 토지와 저택, 그리고 농노도 줬는데, 한 애인은 1천명 이상의 하인과 농노를 받았다고 한다.
그녀에게는 영토 확장과 남성들과의 연애만큼이나 예술에 대한 열정도 있었다. 예카테리나 2세는 오페라를 좋아해 러시아에 오페라를 소개하는 데 큰 역할을 했으며, 이탈리아의 유명 작곡가들을 고용해 오페라를 만들기도 했다. 또 스스로 14편의 희곡, 7편의 단막극, 그리고 9편의 오페라 대본을 쓴 작가이기도 하다.
그녀가 쓴 오페라 대본 중 5개는 궁정 작곡가들에 의해 음악이 붙여졌다. 그녀는 1783년에 왕실 칙령을 내려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오페라와 발레 공연을 위한 볼쇼이 카멘니 극장을 건립하도록 했는데, 그 화려함과 웅장함이 유럽의 극장들을 능가했다고 한다. 오페라 공연을 무대에 올리는 것은 그녀의 권력과 지위를 과시하는 방법이기도 했다. 미술품 수집도 유럽의 다른 왕가들과 경쟁할 목적으로 시작했으나, 실제로 그녀는 박식하고 열정적인 수집가였다. 그녀가 모은 4천여 점에 이르는 옛 거장들의 그림은 세계 최고의 미술품 컬렉션 중의 하나로서 에르미타주 박물관에 전시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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