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매일춘추] ‘다시 일어서다’의 다른 말하기 방식

김동혁 소설가

김동혁 소설가
김동혁 소설가

대구 인근의 한 산업단지에서 중견 플라스틱사출공장을 운영하던 K씨는 2021년 가을, 운영난을 이기지 못하고 결국 공장 문을 닫고 말았다. 30여 년 전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시작한 일이었으니 K씨는 자신의 한 부분이 떨어져나간 것처럼 큰 상실감을 받았다. 거의 100㎏에 육박하는 거구에 무뚝뚝한 성정을 가진 K씨가 폐업신고서를 받아 들고 눈물까지 보였으니 말이다. 10년 전부터 중국산 저가의 상품이 시장을 조금씩 앗아가더니 결국 코로나의 직격탄 앞에서 공장은 더 이상 버텨내질 못했다.

2022년 여름, 어렵사리 공장 터를 매각해 남은 부채를 정리한 K씨는 마침내 대구를 떠나 다른 고장에서 사업을 시작해보기로 마음을 먹었다. 그는 아직 50대 초반이었고 두 아들이 대학도 졸업하지 못한 상태였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때의 K씨에게 대구는 지긋지긋하게 느껴지는 도시였다고 한다. 대구에서 태어나 학교를 마치고 가정을 이루고 살림을 살았지만 경영난에 허덕이는 회사를 어깨에 짊어지고 있던 지난 몇 년간의 상처가 쉽게 아물지를 않았다. 마치 대구가 아무런 보살핌도 주지 않고 한데로 내몬 모진 부모처럼 느껴졌단다.

K씨는 새롭게 정주(定住)할 도시를 정하기 전에 재무 상담도 할 겸, 은행에서 일하고 있는 고등학교 동기를 만나기 위해 대구 수성동에 있는 대구은행 본사를 찾았단다. 찌는 듯한 대구의 무더위는 8월의 정오를 이미 최고 온도로 달궈놓은 상태였다. K씨는 자꾸만 치밀어 오르는 짜증과 분노를 어쩌지 못해 마스크 안에서 몇 번이나 큰 숨을 몰아쉬었다. 사실 그날 K씨는 은행원 친구에게 아쉬운 소리를 하기 위해 그곳을 찾은 것이었다. 새 출발을 위한 대출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날 K씨는 은행원 친구를 만나지 않았고, 그 후 대구를 떠나지도 않았다. 은행 앞에서 한평생 거들떠보지도 않던 시(詩)의 한 구절을 읽고 나서 마음이 바뀌어 버렸다. 마음이 심란했던 K씨는 은행 앞을 몇 번이나 서성이다가 물끄러미 대구은행 본점 서쪽 벽면을 올려다보았단다. 그곳에는 정호승 시인의 '넘어짐에 대하여'라는 시의 한 구절이 적혀 있었다. '아직도 넘어질 일과/일어설 시간이 남아 있다는 것은 큰 축복이다/일으켜 세우기 위해 나를 넘어뜨리고/넘어뜨리기 위해 다시 일으켜 세운다 할지라도'

K씨는 요즘 어느 대형마트에서 배송일을 하고 있다. 한때 사장님 소리까지 듣던 그에게는 큰 결심이었을 것이다. 다행이 타고난 체력 덕분에 그리 힘들게 느껴지지는 않는다고 한다. 그리고 공부를 잘했던 큰 아들이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대구로 이전한 공기업에 취업해 한 시름 놓았단다. 나는 K씨를 며칠 전 만났는데 내게 이런 질문을 해 왔다. "김 선생, 굴기(屈起)가 무슨 뜻이지?" 그간의 사정을 알고 있던 나였기에 나는 빙그레 웃으며 굴기에 대해 말해주었다. 내 설명을 들은 K씨는 묘한 표정을 짓더니 이렇게 말했다. "대충 그런 뜻인 것 같더라니… 배송 다니며 요즘도 대구은행 '글판'을 자주 올려다보는데 올해 적어 놓은 그 굴기라는 말은 '같은 뜻인데도' 작년의 그 시처럼 뭔가 훅하고 감동이 오지 않아." 올 여름 내내 배송일을 하느라 새까맣게 그을린 그가 덩치에 어울리지 않게 수줍게 웃었다. 마치 시를 읽고 마음이 콩닥거리는 소녀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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