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청라언덕] '우리', 무섭고도 힘 있는 말

홍준헌 경북부 기자
홍준헌 경북부 기자

아포칼립스(멸망)를 다룬 영화 '콘크리트 유토피아'에 이런 장면이 나온다.

한겨울 모든 것이 붕괴된 도시 속 유일하게 남아 우뚝 솟은 황궁아파트 주민들이 해당 아파트에 피란 왔던 외부인들을 축출한다. 삶을 위협받을까 걱정하던 주민들은 이내 "아파트는 주민의 것"이라 목 놓아 외친다.

구호 속에는 주민 아닌 외부인은 아파트 밖에서 죽든 말든 상관없다는 뜻이 있다. 함께 외치는 구호 속에서 동정심과 죄책감은 점차 퇴색된다.

이윽고 '우리끼리' 의식은 주민 속에서도 서로를 나누고 가른다. 방범대 조장을 선발하자며 '자가'(자기 집) 입주민 여부를 따지자는 의견을 낸다거나, 밖에서 수일간 헤매다 뒤늦게 집으로 온 주민을 탐탁잖아 하는 시선도 엿보인다.

이런 모습은 재난이나 전시 상황에서만 보이는 건 아니다. 공동체 사회인 한국에서 '우리'라는 의식은 정겹지만 때로는 무섭다.

넓게 보아 '한민족'이 있다. '아시아계 한인(韓人) 민족'이자, '하나의 민족'이라는 뜻으로도 통용된다. 나쁘게는 타국민을 배척·기피하는 기준이 된다. 다문화 사회를 지향하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이웃의 동남아인, 흑인은 '우리'에 포함되지 않을 때가 많다.

좀 더 좁게는 지역주의가 있다. 과거 한 대선 과정에서 나온 "우리가 남이가"라는 말이 경상도의 '우리'를 결집한 것은 유명한 일이다.

대구와 경북을 '우리'로 묶는 의식도 유독 강하다. 1981년 경상북도 대구시가 대구직할시로 분리 승격된 지 40년이 넘도록 끈끈한 관계다.

이 탓에 지역민끼리는 연고를 따져 물어 만난 지 하루 만에도 가족 같은 사이가 되지만, 타 지역민에게는 은근한 폐쇄성과 배타성을 드러내기도 한다.

이례적으로, 두 지역은 올해 잠시 각각의 '우리'가 되기도 했다. 대구경북신공항 내 화물터미널 입지를 군위에 둘 것인지, 의성에 둘 것인지가 쟁점이었다. 학교 동문, 같은 고향, 같은 성씨·가문 등 수없이 많은 '우리'가 서로를 모으고 남을 내치기도 한다. 회사에서는 경영진과 노동자가 편을 갈라 대립하고, 노동자 사이에서도 정규직과 비정규직 등의 이익 앞에서 서로의 아픔을 외면한다.

그럼에도 '우리'라는 말을 마냥 미워할 수 없다. 코로나19 팬데믹이 한창이던 때, 우리는 나로 인해 이웃이 아플까 방역 수칙 지키기에 골몰했다. 품귀를 빚던 마스크를 구할 때까지 외출을 자제하기도, 만날 수 없고 만나서는 안 되던 삭막한 상황에 비대면으로 소통하기도 했다. 내 불편을 감수하며 우리를 지키려던 기억은 엔데믹에 이른 지금도 생생하다.

지난여름 경북 북부를 덮친 집중호우 재난에도 전국 각지에서 자원봉사자와 온정의 기부가 밀려들었다. '우리'에는 분명 큰 힘이 있다.

송년의 달이다. 우리는 각자가 몸담은 여러 개의 '우리' 모임에서 이야기꽃을 피울 것이다. 머잖아 다가올 '민주주의의 꽃' 선거에서 우리 이익을 대변할 '우리' 사람을 선출한 뒤 지역과 국가의 발전을 고대할 것이다. 가족과 친구가 다툼 끝에도 언제나처럼 다시 '우리'로 하나 되기를 반복할 테다.

다가올 새해에는 '우리'라는 말의 아름다움을 좀 더 오래, 많이 봤으면 한다. 때때로 우리를 현혹해 이기심을 부리게도 하지만, 반대로 서로를 뭉치게 해 혼자서는 상상 못 할 능력을 발휘하도록 하는 '우리'. 그 우리가 더욱더 긍정적 힘을 발휘하는 한 해이기를 바라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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