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4인4쌤의 리얼스쿨] 사랑은 회피가 아닌 마찰

다양한 마찰이 존재하는 중학교 1학년 교실
마찰열 둥글어지는 과정의 하나

출처 클립아트코리아
출처 클립아트코리아

12월이다. 3월 2일에 만난 우리 반 아이들과 열 달째 만나는 중이다. 열 달, 그리 길지 않은 시간이지만 사춘기 아이들이 버글버글한 중1 교실에서는 온갖 일들이 벌어졌다.

지난달 우리 반 14명이 교육청 학교폭력(학폭) 심의위원회에 참석했다. 가해 남학생 4명, 피해 여학생 10명. 2차 성징이 나타나는 시기라 성적인 기운이 꿈틀거리는 중학교 교실. 어쩌지 못하는 몸의 변화를 감당할 만큼 정신적 성숙이 따라주지 않은 남학생들이 하지 않아야 할 말과 행동을 교실에서 해버렸다. 심지어 한 남학생은 여학생들의 귀에 대고 성적인 말을 속삭였다. 참다 참다 더는 못 참겠다고, 여학생들이 내게 와 하소연했다. 꽤 긴 시간 동안 진행된 일이라 왜 여태 말하지 않았느냐고 물어보니 남학생들이 고자질쟁이라고 몰아붙이고 '억까'('억지로 까다'라는 뜻의 신조어)를 부리기 때문이란다.

생활안전지도부장 선생님께 사안 조사를 받던 여학생들이 내가 가자, 사실은 그중 한 남학생이 나에게도 반복적으로 욕을 했다고 한다. 학년 초부터 지도하기가 몹시 힘든 학생이어서 숱하게 맞부딪치고 2학기엔 좀 나아졌다고 생각했는데 혼나고 나서 내가 교실에서 나가면 입에 담을 수 없는 여러 가지 욕을 해 왔던 것이다. 담임인 나한테 제일 많이 했지만, 수업 시간에도 혼이 나면 그 과목 선생님이 나가고 나서 그런 욕을 했다. 다른 학생들 듣는 데서 공공연하게 심한 욕을 했고, 들은 학생들이 몹시 불쾌했다고 해 그 학생은 교육청 학폭 심의위 전에 학교에서 선도위원회도 했다.

여학생 12명 중 결석생 1명과 상관없다는 1명을 빼고 10명이 함께 피해자가 되면서 여학생들끼리 끈끈해진다 싶었는데 그것도 잠시 여학생들 사이에도 틈이 벌어졌다. 그냥 당하고만 살 것이 아니라 힘들면 개선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걸 알게 돼서일까. 서로에게 쌓인 불만이 여기저기서 터지면서 특히 평소 친구에게 상처 될 말을 쉽게 하던 여학생 A가 가까운 친구들과도 싸우게 돼 설 자리가 좁아졌다.

며칠 전에는 A에게 늘 순하게 대해주던 다른 여학생 B가 상담을 요청했다. 그 친구가 초등학교 때도 자기를 왕따시킨 적이 있어, 또 그럴까 봐 무섭다고 토로했다. A에 대한 생각으로 밤에 잠이 오지 않는데 학폭 신고를 해야 할지 말지 묻는다. 지난 3월 이미 초등학교 때 얘기를 나한테 해 줘서 꾸준히 지켜봐 왔는데, A는 다소 못되게 말해도 B는 늘 친절하게 대해줬다. 근데 그건 A가 무서워서 싫은 내색을 못 한 것이라고 했다. B는 최근 운동회 때도 우리 반 친구들과 함께 장기 자랑에 나가 댄스를 했고, A는 거기 끼이지 못했다. 지금 우리 교실에서는 A가 더 어울릴 친구가 마땅치 않은 상황이란 것도 인정한다. A는 세기 때문이 아니라 약해서 말을 까칠하게 하는 거고, 지금은 A가 그동안 함부로 한 말 때문에 살짝 벌 받고 있는 중이니 무서워할 필요 없다고 얘기하니 알 듯 말 듯 한 표정을 지으며 돌아갔다.

그런데 오늘 종례 시간 교실에 들어가 보니 다들 표정이 좋다. 스포츠 시간 축구 경기에서 남학생들은 1등을 했고, 여학생들은 3등을 했단다. 참고로 우리 학교는 한 학년이 4개 반이라 경기를 두 번만 하면 순위가 결정된다. 지난주 첫 우승을 거머쥔 남학생들은 종례 시간에 세레머니를 수도 없이 했고, 지난주 진 여학생들은 오늘 또 져서 4등 할 줄 알았는데 3등을 차지해 행복해 했다.

종례 후 여학생들을 따로따로 불러 물어보니 이제 괜찮단다. 싸우고 서먹했던 아이들도 오늘부터는 괜찮아졌다 하고, 친구를 무서워하던 아이도 그럴 필요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고, 싸우고 화해를 시도해 봤지만 안 받아주는 아이와는 그냥 손절하고 지내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한다. 아마 몸으로 함께하는 반 대항 경기들을 하면서 한목소리로 응원하다 보니 맺힌 감정들이 스르르 풀렸나 보다.

남학생들은 더 일찍 괜찮아졌다. 내가 말로 지도할 때는 쉽사리 내 말을 안 들어주던 아이들도 학폭이라는 큰 일을 겪으며 달라졌다. 자기들의 잘못으로 부모님까지 곤란한 상황에 처하게 한 것도 미안할 것이다. 교육청 가기 전에 불러서 남 겪지 않는 일을 겪는데 그게 거름이 되도록 해야지 않겠느냐고 하니, 다들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이제부터는 달라지겠다고 굳게 약속했다. 학폭위 다음 날 학년 전체 운동회를 강당에서 했는데 그때 우리 반에서 가장 말 안 듣던 아이가 백군 대표로 활약했다. 그날 학급에 문화상품권(문상)이 한 장 생겨서 누구한테 주면 모두가 기분 좋겠냐고 물었더니 백군 대표로 활약한 그 친구를 추천했다. 그 친구는 이미 문상을 한 장 받았지만 누가 뭐래도 그날의 MVP라는 데 다들 동의했다.

우리는 이렇게 살아간다. 교실이란 곳에서 함께 버글거리다 보면 분명 부대끼게 된다. 이때 사랑은 회피가 아니고 마찰이다. 마찰하다 보면 열이 나기도 하지만 모났던 것이 둥글어진다. 둥글어진 곳에 윤이 나기도 한다. 오늘 아이들 얼굴에서 반짝반짝 윤이 났다.

교실전달자(중학교 교사 배꽃쌤)

많이 본 뉴스

일간
주간
월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