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이덕일의 내가보는 가야사] ⑬일본 내의 가야계 고분들

일본 곳곳 가야계 산성·고분…고대 한국인의 '日 분국설' 입증
야마토왜 수도 '나라'의 전방후원분…한국에서도 발견되며 기원 밝혀져
서기 기록된 조선식 산성 '키노죠'도…고대 가야인의 활발한 日 진출 증거

일본 주고쿠지방의 전방후원분 중 하나인 오카야마 쯔쿠리야마(造山) 고분.
일본 주고쿠지방의 전방후원분 중 하나인 오카야마 쯔쿠리야마(造山) 고분.

▶전방후원분이라는 무덤

일본 주고쿠지방(中國地方)의 오카야마(岡山)현에는 한자표기는 다르지만 일본어 발음은 같은 두 거대한 고분이 있다. 쯔쿠리야마고분(造山古墳)과 쯔쿠리야마고분(作山古墳)이다. 앞부분은 네모나고 뒷부분은 둥근 전방후원분(前方後圓墳)이다. 경상도와 전라도에도 전방후원분이 있는데 이에 대해 국내의 강단 사학자들은 전방후원분은 일본식 용어이기 때문에 '장고형고분'으로 부르겠다고 말한다. 서론에서는 전방후원분이란 명칭을 안 쓰는 것으로 자신들은 식민사학자가 아니라고 표명한 다음 본문에 들어가면 이를 '왜계(倭系) 고분'으로 부른다. 식민사학 논란에 휩싸인 《전라도천년사》에서는 심지어 이 고분들이 "5세기대 일본열도에서 중국 남조에 사신을 보내는 해로 관리를 위해 파견된 사람들(《전라도천년사》 4권 139)"의 무덤이라고 말해서 고대 전라도를 야마토왜의 식민지라고 서술했다. 서론의 내용과 본론의 내용이 서로 다른 '따로국밥 역사학'이 한국 식민사학의 주요한 특징 중의 하나라고 여러 번 말했다. 아비를 아비라고 부르지 못하는 서자(庶子)의 슬픈 자화상이다.

일본에서는 한국 내에서 전방후원분이 발견되자 크게 긴장했다. 일본 고유의 무덤으로 알려졌던 전방후원분의 기원이 고대 한국으로 드러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국의 강단사학자들이 '왜계' 운운하면서 고대 야마토왜인들의 한반도 남부 지배를 증명하는 것처럼 조작하자 일본 내에서도 '조선반도 남부의 전방후원분'이라고 말하고 있다.

▶오카야마의 가야계 전방후원분과 가야계 산성

경상도, 전라도를 막론하고 국내의 전방후원분은 모두 '왜계'가 아니라 '가야계'나 '백제계' 고분이다. 이미 말했던 것처럼 큐슈(九州)에 있는 전방후원분인 에다후나야마(江田船山古墳)고분은 백제계 고분이고 오카야마의 두 쯔쿠리야마 전방후원분은 가야계 고분이다. 오카야마현 소쟈시(総社市)의 쯔쿠리야마고분(作山古墳)은 길이가 282m, 높이가 24m에 달하는데 일본 내 5,200여 개의 전방후원분 중 10번째로 크고 현 내에서는 두 번째로 큰 고분으로 5세기 초반에 축조되었다. 오카야마시(岡山市)의 쯔쿠리야마고분(造山古墳)이 350m 길이에 29m 높이로 오카야먀현 최대이자 일본 전체에서 네 번째로 큰 전방후원분인데 5세기 중반에 축조된 것이다. 이 쯔쿠리야마 고분은 주위에 여섯 개의 배총(陪塚)이 있는데 그중 사사키야마(木神山)고분에서는 가야계 도질토기 조각과 함께 많은 양의 도검, 구슬류 등과 6개의 청동제 말모양 띠고리가 나왔다. 경북 영천과 상주, 선산 등지에서 출토된 말모양 띠고리와 같은 형태이다.

야마토왜의 수도였던 나라(奈良)의 전방후원분은 일본 왕실의 행정관청인 궁내청(宮內廳)이 관할하면서 출입을 엄격하게 막고 있다. 물론 발굴허가도 아주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내주지 않는다. 발굴해보면 대부분 가야계 아니면 백제계 유물이 나오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카야마의 두 쯔쿠리야마 고분은 누구나 올라갈 수 있게 허용되고 있다.

이 무덤을 비롯해서 오카야마현의 여러 유적들은 고대 가야인들이 일본 열도에 활발하게 진출했음을 말해주고 있다. 그런 유적 중 하나가 오카야먀 소쟈시의 '키노죠[鬼の城]'라는 산성이다. 표고 397m의 귀성산(鬼城山) 정상부를 빙 둘러 석벽(石壁)과 토루(土壘) 등으로 쌓았는데 산성 길이가 2.8km나 된다. 일본에서는 《일본서기(日本書紀)》 등에 축조사실이 명확하게 기록되어 있는 산성들을 조선식 산성이라고 부르다가 요즘은 식민사학이 다시 기승을 부리면서 '조선식'이라는 용어를 버리고 '고대산성(古代山城)'이라고 부른다. 이 산성들은 백제가 멸망한 후 백제 유민들이 일본 열도로 건너가서 쌓은 성이다. 《일본서기》에 축조사실이 기록되지 않는 산성들이 신롱석식(神籠石式)산성인데 이는 모두 고대 한국인들이 일본열도로 건너와서 쌓은 성이다. 키노죠 역시 신롱석식인데 이 산성에 대해서 남한 학계는 침묵으로 모른체 하는 반면 북한 학계는 가야계 산성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1986년 북한의 학자대표단과 기마민족도래설을 주창했던 에가미 나미오(江上波夫) 도교대 교수 등과 학술대회를 하고 북한 학자들은 키노죠를 답사하기도 했다.

기비쯔히코또(사도장군 중 서도 장군).
기비쯔히코또(사도장군 중 서도 장군).

▶오카야마의 우라 전설과 분국설

그런데 이 산성과 관련해서 오카야마에는 흥미로운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그중 하나가 우라(温羅)전설이다. 오카야마는 고대 기비국[吉備國]이 있던 곳인데 백제의 왕자인 우라가 성을 쌓아 거주하면서 자신을 '기비의 관자(기비국의 우두머리)'라고 불렀다. 우라는 서쪽에서 야마토왜의 수도 나라(奈良)로 보내는 곡물이나 처녀를 강탈했다. 그래서 오카야마의 백성들이 그를 두려워해서 우라가 쌓은 성의 이름을 '키노죠[鬼の城]', 곧 '귀신의 성'이라고 부른 것이다. 나라에서는 우라를 정벌하러 여러 장수를 보냈지만 우라의 변화무쌍한 용병술에 모두 패전했다. 이번에는 일왕 코레이(孝靈)의 아들로서 용기와 무예를 겸비한 이사세리히꼬노미꼬또(미꼬또)를 파견했다. 미꼬또는 대군을 거느리고 오카야먀에 가서 우라와 싸웠다. 미꼬또가 아무리 화살을 쏘아도 우라를 맞히지 못하자 미꼬또는 천근무게의 강한 궁을 가지고 화살 두 대를 쏘았다. 한 대는 바위에 맞았지만 한 대는 우라의 왼쪽 눈에 명중해서 피가 물처럼 흘러 강을 이루었는데 그 강을 피가 흐르는 강이라는 뜻의 '찌수이강(血吸川)' 혹은 '찌미즈강(血水川)'이라고 부른다. 방책이 궁해진 우라는 드디어 항복했고 '기비의 관자'라는 칭호를 미꼬또에게 바쳤다. 이후 이사세리히꼬노미꼬또는 이름을 기비쯔히꼬노미꼬또라고 칭했다. 오카야마시 북구에 있는 큰 규모의 기비히비쯔신사(吉備津彦神社)가 기비쯔히꼬노미꼬또를 신으로 모시는 신사이다.

우라는 백제계 왕자라고 전해지지만 우라가 거주했다는 키노죠가 가야계 산성이라는 점에서 가야계일 가능성이 더 높다. 오카야마의 두 거대한 쯔쿠리야마 고분은 야마토왜가 5세기까지 이 지역을 차지하지 못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야마토왜의 수도인 나라에서 한반도로 오려면 세토내해[瀨戶內海]를 통과해야 하는데 오카야마 남쪽을 거치지 않으면 불가능하다. 오카야마의 두 거대 고분과 키노죠는 적어도 5세기까지는 이 지역을 가야계가 장악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백제계가 장악한 야마토왜에 맞서는 가야계 세력이 오카야마에 있었음을 말해준다. 북한의 김석형이 1963년 《력사과학》에 〈삼한삼국 이주민들의 일본렬도 내 분국에 대하여〉를 발표해서 가야·백제·신라·고구려 사람들이 일본열도에 진출해서 분국(分國)들을 세웠다는 분국설(分國說)이 사실임을 알 수 있다.

오카야마 소쟈시의 산성, 키노죠(귀신의 성).
오카야마 소쟈시의 산성, 키노죠(귀신의 성).

▶궁내청에서 관리하는 고분

일본은 6세기까지 제철기술이 없었다는 사실과 오카야마 지역을 가야계가 차지하고 있었다는 사실은 야마토왜가 4세기 후반에 가야를 점령하고 임나일본부를 세웠다는 임나일본부설이 허구라는 사실을 다시 말해준다. 우라전설은 야마토왜가 오카야마 지역을 차지하는 과정에서 격렬한 충돌이 발생했음을 말해준다. 올해 5월 필자 일행이 도쿄에서 한일공동 심포지움을 마치고 오카야마를 답사했을 때 아주 흥미로운 사실을 발견했다. 키노죠를 비롯해서 두 쯔쿠리야마 고분을 답사하고 기비히비쯔신사에서 그리 멀지 않은 기비쯔히꼬노미꼬또의 무덤이라는 나카야마챠스야마(中山茶臼山)고분을 찾았다. 이 고분의 실제 피장자가 미꼬또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일본은 메이지[明治] 이후인 19세기 말에 황국사관(皇國史觀)이 성행하면서 관료들과 학자들이 《능묘참고도(陵墓參考圖)》라는 책을 가지고 다니면서 전방후원분에 여러 일왕이나 그 왕비의 이름을 붙였다. 나카야마챠스야마고분도 메이지 7년(1874)에 미꼬또의 무덤으로 명명한 것이다. 그런데 앞의 두 거대한 쯔쿠리야마 고분은 일반인도 자유롭게 출입할 수 있지만 이 미꼬또의 무덤은 궁내청에서 출입금지를 시켜놓았다. 야마토왜에서 파견한 일 왕가의 무덤이라는 뜻이었다. 백제계 야마토왜와 가야계의 충돌 사건은 현재까지 이렇게 살아서 기능하는 것이다. 가야사 전공이라는 김태식 홍익대 명예교수는 "(김석형은) 《일본서기》를 비롯한 문헌사료들을 이용할 때 거의 모든 사료를 무리하게 일본열도에서의 사실로 억측함으로써 한반도 내 가야사를 포기한 결과를 초래하였다(《한국전근대사의 주요쟁점》)이라고 분국설을 비판했다. 그러나 이 또한 앞뒤가 다른 따로국밥 역사학의 궤변에 불과하다. 한반도 내 가야사는 가야 본국사로 연구하고, 일본 열도내 가야 분국사는 가야계의 일본열도 진출사로 연구한다면 가야사가 풍부해지는 것이지 어떻게 '한반도 내 가야사를 포기한 결과'가 될 수 있겠는가?

2023년은 가야사를 임나일본부사로 둔갑시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하려던 식민사학의 매국 카르텔 기도를 역사시민운동가들이 막아낸 해이다. 오카야마뿐만 아니라 일본 열도 내에 곳곳에는 존재하는 가야계 유적들은 가야의 찬란한 역사를 말해주고 있다. 일본 열도 내 가야유적들이 제대로된 평가를 받는다면 아직도 우리나라 국민들의 역사관을 갉아먹고 있는 식민사학은 설 자리를 잃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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