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다른 사람들은 자거나 떠나 없고, 아가톤과 아리스토파네스와 소크라테스 선생님만이 자지않고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돌아가며 큼직한 잔으로 술을 마시고 있었데. 소크라테스 선생님께서는 여전히 이들과 대화를 나눴는데... 졸음이 와서 아리스토파네스가 먼저 잠들고 날이 밝아올 때 아가톤도 잠들었고.소크라테스 선생님은 그들이 자도록 누이고 일어나 리케이온으로 가서 목욕하고 하루를 보내다 저녁에서야 집에 들어가 주무셨대.(플라톤 『심포지온(향연, 饗宴, Symposion)』, 천병희 번역, 도서출판 숲)". 24살의 부잣집 아들 아폴로도로스가 친구에게 들여주는 액자소설 형식의 『심포지온』 마지막 대목이다.
B.C416년 열린 실제 심포지온을 다룬 이 작품에서 2가지를 확인할 수 있다. 심포지온에서 밤새도록 포도주를 마시고, 특정 주제로 많은 대화를 나눈다는 점이다. 연말 송년회가 한창이다. 송년회에서는 으레 거나하게 마시거나 이런저런 담소를 나눈다. 한국 송년회와 닮은꼴, 2천4백여년 전 아테네 심포지온으로 들어가본다.
◆리케이온(Lykeion), 심포지온 뒤 소크라테스가 목욕하던 곳
소크라테스가 밤새 술 마시고 목욕하던 리케이온으로 가보자. 지금은 시내 중심지이지만, 플라톤의 『심포지온』 이 쓰일 무렵에는 아테네 성벽 밖이었다. 아폴론 리케우스(Apollon Lyceus, 늑대 아폴론), 즉 태양신 아폴론을 기리는 성역소다. 동시에 레슬링 체육관 팔레스트라와 일반운동 체육관 김나지온, 그리고, 목욕탕이 있었다.
소크라테스는 그 목욕탕에서 밤샘 음주로 지끈지끈한 머리를 맑게 할 겸 몸을 닦고, 일과를 시작한 것이다. 소크라테스가 목욕하던 이곳에 B.C 334년 아리스토텔레스가 학교를 세웠다. 학교 이름도 리케이온이다. 공공장소에 아리스토텔레스가 사사로이 사립학교를 세울 수 있던 비결은 제자 덕이 크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제자가 당대 그리스문명권의 패자 알렉산더였다.
알렉산더는 13살부터 16살까지 아리스토텔레스한테 배웠다. 알렉산더는 페르시아 원정 도중 얻은 많은 인문학, 자연과학 자료들을 스승의 리케이온에 보내 연구를 도왔다. 프랑스에서 고등학교를 리세(Lycee)라고 부른다. 리케이온에서 따왔다. 아테네 리케이온은 잘 발굴돼 아리스토텔레스의 전설을 되살려준다.
◆심포지온, '함께 마시며 대화하는 술자리'
런던 대영박물관 그리스 전시실을 찾으면 B.C6-B.C5세기 흑색, 적색 인물기법 도자기들이 탐방객을 맞아준다. 한국이나 중국 도자기와 달리 그리스 도자기 표면에는 다양한 풍속이 묘사돼 흥미롭다. 심포지온도 자주 쓰던 소재다. 이탈리아 나폴리에서 출토된 심포지온 장면 도자기를 보자. 남자 2명이 비스듬히 눕듯이 앉아 포도주를 마신다.
심포지온의 어원 '심포테인(Sympotein)'은 '함께 마신다'는 뜻이다. 장소 접미사 '온(on)'이 붙어 굳이 직역하자면 '함께 마시는 술자리'라는 의미다. 그러니, '혼술'은 심포지온이 될 수 없다.
심포지온에서 술만 마신 것은 아니다. 그리스는 학구적인 분위기가 넘쳐흘렀다. 비결은 대화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쓰기보다 구술(口述) 문화에 익숙했다. 소크라테스는 단 한 권의 책도 쓰지 않았다. 대화식 문답의 변증(辨證, Dialectic)으로 제자들의 무지를 깨우쳤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리케이온에서 제자들과 산책하면서 대화를 통해 지식을 가다듬은 데서 나온 소요학파(逍遙學派)도 같은 맥락이다. 민주사회이다보니 대중의 호응을 이끌어낼 연설 능력이 필요했고, 엘리트층은 수사학(修辭學)에 공을 들였다. 이렇게 말하기의 구술중시 문화가 저녁 술자리와 결합돼, '함께 술마시며 대화하는' 심포지온 문화가 꽃폈다. 플라톤의 『심포지온』에서 대화 주제는 '에로스(Eros)' 즉 '사랑'이었다.
그리스를 무너트리고 B.C 1세기 지중해 최강자가 돼 로마에 의한 평화, '팍스 로마나'를 구현한 로마는 심포지온 문화를 받아들였다. 로마제국의 언어 라틴어에서 장소 접미사는 '움(um)'이다. '심포지온'이 '심포지움(Symposium)'으로 바뀐다. 로마에서는 콘비비움(Convivium)이라고도 불렀다. 로마의 용어 심포지움이 게르만 민족의 영어로 전달돼, 오늘날까지 쓰인다. 영어식 발음은 '심포지엄'이다. 내용도 바뀌었다. 포도주 마시기는 쏙 빠지고, 대화와 토론의 학구적 형식만 남은 거다.
◆헤타이라, 조선시대 기생(妓生) 닮은꼴
대영박물관에서 다른 도자기 그림을 보자. 북아프리카 리비아에서 출토된 B.C420년 경 도자기다. 심포지온에 참석중인 남성 앞에 한 여성이 앉았다. 심포지온에 여성도 참여한 것인가? 조선을 대표하는 기생 황진이를 떠올리면 쉽다. 연주하고, 노래하고, 술도 따라준다. 시를 쓰며 선비들과 문학적 시담(詩談)도 나눈다. 그리스 심포지온에 참석하는 이런 기생을 '헤타이라(Hetaira)'라고 부른다.
아테네 고고학 박물관의 B.C400년 경 도자기 그림을 보면 3명의 심포지온 참석 남성들 앞에서 관이 두 개 달린 이중피리 아울로스를 부는 헤타이라의 모습이 나온다. 아울로스를 불거나, 키타라를 켜고, 서정시 엘레게이아(Elegeia, 연가, 戀歌)를 노래로 불렀다. 춤도 췄다. 대영박물관에 전시중인 B.C430년 도자기 그림에는 요즘 연예인 연습생 뽑아 연습시키듯 소녀들을 선발해 춤과 기예를 가르치기는 장면이 묘사돼 있다. 헤타이라는 심포지온 참석자들과 토론식 대화도 나눴다. 유희적, 지적 교류를 나눈 셈이다.
소크라테스가 참석한 B.C416년 아가톤 주최 심포지온에도 헤타이라가 참여했을까? 플라톤의 『심포지온』을 보면 헤타이라를 불렀지만, 안채로 보내 집안 여성들과 여흥시간을 보내도록 한다. 대화 위주 심포지온을 결정했기 때문이다. 심포지온은 언제 열었을까? 우리네 회식과 비슷하다. 축하나 기념할 일이 있을 때다.
플라톤의 『심포지온』 은 소크라테스의 제자 아가톤이 B.C416년 비극 극본 경연대회 입상을 기념해 개최한 심포지온을 다뤘다. 특별한 사안 없이 포도주 마시려고 여는 경우도 있었다. 장소는 집이다. 고대 그리스 주택은 남자 주인이 거주하는 사랑채인 안드론(Andron)과 여성들의 안채인 기나이케이온(Gynaikeion)으로 나뉜다.
안드론에 긴 돌벤치를 여러개 놓고, 그 위에 푹신한 쿠션을 깐 뒤, 여기에 왼팔을 대고 비스듬히 눕는 자세로 술 마시며 대화를 나눴다. 서너 명에서 20여명까지 참석했다. 아가톤이 개최한 심포지온에는 소크라테스를 포함해 7명이었다. 심포지온을 개최하는 전문 식당도 있었다.
◆에우블로스, 고주망태에 보내는 충고
프랑스 루브르 박물관으로 가서 B.C5세기 도자기 그림을 통해 심포지온에서 포도주를 어떻게 마셨는지 살펴보자. 크라테르(Krater)라는 커다란 포도주 혼합단지 앞에 알몸의 청년이 포도주를 담는 피쳐와 포도주잔 퀼릭스를 들고 있다. 크라테르에서 포도주를 퍼 나르는 중이다. 그리스인들은 크라테르에 포도주 원액을 넣고, 물을 타서 포도주 농도를 조절했다.
취하도록 마실 거면 물을 적게 타 진하게, 대화에 치중할 거면 물을 많이 타 묽게 마셨다. B.C416년 아가톤 주최 심포지온에서는 술을 강권하지 말고 주량껏 적당히 마시며 대화에 치중하자고 다짐한다. 하지만, 밤늦게 알키비아데스가 오면서 상황이 바뀐다. 이미 다른 데서 잔뜩 취해 온 그가 술을 강권하며 소크라테스를 포함해 모두 코가 삐뚤어지도록 마신다.
루브르의 또 다른 B.C5세기 도자기 그림은 크라테르 앞에서 술에 취해 춤을 추며 즐기는 장면이다. 음주가무! 중국의 진수가 297년경 저술한 『삼국지』 「동이전」 속 부여의 우리 민족 풍습과 닮았다.
B.C 4세기 초 활약했던 아테네 시인 에우불로스의 과음 경계령을 타산지석(他山之石)으로 떠올린다. "분별있는 사람은 3잔을 마신다. 첫잔은 건강, 둘째 잔은 사랑, 세 번째 잔은 숙면을 위해! 4잔부터 사람이 나빠지는데, 5잔 마시면 고함 지르고, 6잔 마시면 거칠어지며, 7잔 마시면 싸운다. 8잔 마시면 부수고, 9잔 마시면 침울해지다가 10잔 마시면 인사불성이 된다"
김문환 역사저널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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