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로 60세가 되는 K씨는 5년 전 신축 아파트에 입주했다. 30년간 이사 한 번 없이 살아온 주택이 재개발 단지에 들어가면서 조합원 자격을 얻은 것이었다. 단층주택에서 무려 17층까지 삶의 공간을 옮긴 K씨와 그의 가족들은 그 높이의 차이가 곧 삶의 지표를 끌어올려 놓은 것처럼 생각되기도 했다. 게다가 입주 직후부터 3년간 아파트는 거의 세 배가 올랐으니(잘 알고 있는 그 정부시절이다) K씨의 자부심(ego)이 터무니없다고만 할 수는 없을 것이다. 부동산이란 것이 값이 오른다고 해 당장 현금이 생겨나는 것은 아니지만 뭔지 모를 든든한 뒷배를 깔고 있는 것 같아 '아파트 잘 샀다는 이야기'가 나온 모임에서는 슬그머니 밥값을 지불한 적도 몇 번 있다.
그래서였을까? K씨는 입주 직후부터 아파트 주민회와 운영회의 거의 모든 '요직'을 돌아가면서 맡고 있는데 어떤 직책이든 하는 일은 사실 대동소이(大同小異)한 편이었다. 언젠가 K씨는 입주자대표선거에 나서며 이런 출마의 변을 밝힌 적이 있다. '…벽과 바닥과 천장을 공유하는 삶은 곧 거의 비슷한 재산을 보유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중략) 그러므로 같은 아파트에 산다는 것은 같이 부자가 될 수 있는, 말 그대로 사촌보다 더 가까운 삼촌쯤 되는 경제공동체가 됐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밤새 문장을 수정하던 K씨는 '같이 부자가 될 수 있다'는 이 부분에서 돌연 마음이 울컥해져 진심으로 '우리의 아파트'를 위해 봉사하겠다는 다짐을 더 공고히 했다.
당연하게도 요즘 K씨의 고민은 이만저만이 아니다. 슬그머니 꼬리를 내리기 시작한 아파트 값이 벌써 2년째 반등의 기미를 보이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한때 동네에 대여섯 개나 성업하던 부동산 중개사무실도 이제 거의 떠나버리고 남아 있는 부동산들도 출근조차 하지 않는지 통유리문에 붙여 놓은 시세표도 색이 누렇게 바랜 지가 오래다. 작년에 입주자대표 임기를 마친 후 자치발전위원장직을 수락한 K씨는 요즘 자주 임시 주민 회의를 소집하여 대책을 마련해 보려고 하지만 신통한 수를 찾을 수는 없었다.
더욱 걱정스러운 것은 K씨의 아파트 바로 옆에 위치한 구축 아파트의 소유자들이 정말 터무니없는 가격으로 집을 내 놓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인근의 같은 평수 아파트가 가격을 내리면 아무리 신축이라고 해도 동반 하락이라는 타격은 불가피한 일이었다. 특단의 조치가 필요했다. 가격을 반등시킬 수는 없지만 훗날을 대비해 '우리 아파트의 차별성'은 분명히 해 둘 필요가 있을 것만 같았다.
장고 끝에 K씨는 '입주민 중심의 건강하고 안전한 녹지 공원 아파트'라는 장기적인 방안을 수립했고 이번 임시회에서 '단지 내 택배차량 및 배달 오토바이 진입 금지'라는 1단계 실천안을 발표했다. 몇몇 우려의 목소리가 있었으나 묵살됐고 관리사무실을 통해 이 의견은 곧 택배 회사에 전달됐다. 또한 현수막으로 제작돼 단지 곳곳에 나부끼게 됐다.
예상들하고 있겠지만 K씨의 아파트는 얼마 전 택배 기사들의 배송 거부로 전국 뉴스에까지 소개되었던 그 아파트가 맞다. 손수레를 끌고 직접 정문까지 택배를 찾으러 가던 그 입주민들의 행렬 속에 난감한 표정의 K씨도 있었다. 유명세를 탄 탓에 지금 K씨의 아파트는 바로 옆 구축 아파트보다 10퍼센트 정도 싼 값에 매물이 올라오고 있지만 거래는 절벽인 상태이다. 유튜브에서는 택배기사들에게 삿대질을 하며 고함을 지르고 있는 '얼굴이 흐릿하게 지워진' K씨의 모습도 함께 찾아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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