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학년도 대학수학능력시험(이하 수능)은 다른 어떤 해보다 국민적 관심이 뜨거웠던 시험이었다. 정부가 사교육 부담을 줄이고자 '킬러문항'을 배제하겠다고 했지만, 수능 성적표를 받아든 수험생들은 '불수능'을 넘어 '용암수능'이라고 평가했다. 학부모들은 앞으로 더욱 사교육에 의존해야 하는 것은 아닌지 불안감에 휩싸이고 있다.
15일 매일신문 유튜브에서 방송인 김쌤(대경대 교수)이 진행한 '김쌤의 나노분석' 1회에는 윤일현 전 지성학원 이사장(윤일현교육문화연구소대표)이 출연해 '수능과 입시'를 주제로 자녀 교육법, 대입 전망 및 의대 광풍 원인 등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줬다.
윤 전 이사장은 자녀 교육에 성공하기 위해선 부모가 기다림에 대한 지구력이 있어야 한다고 했다. 또한 자녀를 믿고 맡긴다는 태도를 지니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대구 경신고 출신 재수생이 수능 표준점수 수석을 차지했다. 도대체 수성구는 왜 성적이 좋은가?
▶일단 중학교에서 고등학교로 진학하는 학생들의 성적이 우수하다. 수성구는 사교육을 포함해 교육 인프라가 다른 곳보다 낫고, 서울 대치동 못지않다고 생각한다.
학교에서 가르치는 선생님들의 열정도 남다르며 학교의 뒷받침, 그리고 학부모들이 나쁘게 이야기하면 '극성'이지만, 좋게 이야기하면 '뒷바라지'를 잘한다. 이런 요소가 합쳐져서 성적이 좋은 학생들이 많이 나오고 있다.
-'아이 공부를 시키려면 수성구에 가야 한다', '수성구에 갔다가 아이 기만 죽는다' 중 어떤 게 맞나?
▶경쟁 자체를 즐기고, 거기에서 오는 압박을 잘 견뎌낼 수 있는 학생이라면 경쟁을 통해 발전할 수 있을 것이다. 반면, 경쟁을 힘들어하고 어려워하는 학생이 있다. 이런 학생은 조금 편안한 곳에서 공부를 하는 게 나을 수 있다.
즉 아이의 성향과 적성에 따라 차이가 있으며, 어느 쪽이 무조건 좋거나 나쁜 것은 없다. 수능 최고점이 수성구 외의 학교에서도 자주 나온다. 결론을 이야기하면 옛 어른들의 말씀대로 '어디에 있어도 자기가 하기 나름'이다.
-정부가 사교육을 없애고자 이번 수능에서 '킬러문항'을 없앴다고 밝혔다. 정말 솔직하게 학교 수업만으로 수능 만점이나 수석을 할 수 있을까?
▶결론부터 말하면 만점, 수석 모두 가능하다. 그런데 '킬러 문항을 배제한다고 하면 사교육 수요가 줄어들까'란 전제부터 살펴봐야 한다.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 먼저 '내년부터 명문대 의대가 신입생을 구구단 암기로 선발하겠다'고 하면 사교육이 없어질까를 물어보고 싶다.
절대 안 없어진다. 시중 학원들은 밤새 '구구단 광속으로 암기하는 비법 최초 공개'라는 식으로 간판을 바꿔 달 것이다. 즉 경쟁이 있는 곳에서는 이기기 위한 수단이 어떻게든 생길 수밖에 없다.
-올해 수능에서 N수생이 많았다고 하는데, 내년에는 더 늘 것이란 이야기가 있다.
▶수능이 올해처럼 변별력이 있고 어려우면 최상위권 재수생은 급속도로 줄어든다. 문제가 쉽게 출제돼 '억울한 학생'이 많아야 재수생이 많아진다. 올해처럼 적절한 변별력이 있을 때는 그렇지 않다.
그리고 학생들이 재수를 하면 다 성공하는 것 같지만, 오랜 세월 분석한 결과 10명이 재수를 하면 2, 3명은 성적이 올라가고 서너 명은 제자리다. 또 2, 3명은 도리어 성적이 떨어진다. 즉 재수를 해서 실제로 점수 변화가 의미 있게 성공할 확률은 30%밖에 안 된다는 것이다.
-요즘 의대 광풍이 불고 있는데, 대구가 유독 심한 것 같다.
▶오래전 그 이유에 대해 분석을 해봤는데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 대구에 의대가 4개 대학(경북대, 영남대, 계명대, 대구가톨릭대)으로 많이 있다.
그리고 과거 대구는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 전 대통령을 배출하는 등 권력 창출의 핵심이었는데, 그 와중에 혜택을 본 이들은 아주 극소수다. '권력 무상'에 대한 생각이 많은 것이다.
또한 외환위기 때 우리 지역의 기둥 같은 기업들이 많이 흔들리고 사라졌다. 섬유 산업을 비롯해 유통, 건설, 금융이 다 위기를 겪었다. 당시 이 지역의 상당수 가장들이 '조퇴'(조기퇴직), '명퇴'(명예퇴직), '황퇴'(황당한 퇴직)를 당했다.
이런 걸 겪으면서 부모들이 '나는 힘겹게 살지만 자녀는 이렇게 안 살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일까'를 떠올리게 됐다. 그 결과 '자격증 있는 직업'을 떠올리게 됐고, 그중에서 의대가 가장 좋다고 본 것이다. 우리 지역에서 의대 열풍이 타 시도보다 앞서 시작된 것은 이런 사회경제적인 요인과 관계있다고 본다.
-의대가 워낙 인기가 많아서 이러다 '영어유치원'처럼 '의대유치원'도 나오는 것 아닌가 모르겠다. 의대에 가려면 유치원 때부터 준비를 해야 되는가?
▶나에게 만약 학생이나 학부모를 멋대로 할 수 있는 사법권이 주어진다면 의대유치원, 초등학생 의대반을 만든 학원이나 그곳에 보내는 학부모 모두 아동학대죄로 구속하겠다. 그건 아동학대다.
가스통 바슐라르(프랑스의 철학자)는 '유년은 존재의 우물'이라고 했다. '유년 시절'이라는 우물에 즐겁고 행복한 추억을 많이 담아야 한다. 그래야 나이가 들어 삶의 어려운 고비를 겪을 때마다 즐겁고 행복했던 기억이 에너지원으로 작용해 극복할 수 있다.
제가 본 결과 극성 학부모들의 관심과 자녀에 대한 지나친 투자의 '약발'은 중2 정도까지는 간다. 그런데 그다음부터는 확연히 달라진다.
즉 세상을 바라보는 태도와 관점, 학습 습관, 배움에 대한 즐거움을 길러줘야 한다. 아이에게 숙제를 주고 밤새도록 하도록 하는 게 중요한 게 절대 아니다. 서울대 표어인 라틴어 '베리타스 룩스 메아'(Veritas Lux Mea)는 '진리는 나의 빛'이라는 뜻이다. 고뇌하고 애를 써서 무언가를 깨치면 그 순간 내 가슴이 환해지는 진리, 그것이 바로 배움의 기쁨인데 이것을 느끼도록 해야 된다.
-오히려 공부 잘하는 자녀를 둔 부모들은 극성이 아닌 경우가 많다.
▶그렇다. 오랫동안 학생들을 보면서 느낀 결론은 '입시 설명회 열심히 다니고, 입시 정보 잘 아는 집(부모) 치고 공부 잘하는 학생 없다'는 것이다. 엄마가 그런 쪽으로 무지할수록 아이들은 행복하다. 그리고 요즘엔 정보를 몰라서 대학에 못 가는 일은 없다. 실력이 모자라서 못 가는 것이다.
-지금 고2 학생들은 지금 벌써 자신들이 고3이라 생각하고 학원에 다니며 본격적으로 수능 준비를 한다. 선행학습이 정말 투자 대비 생산성이 높은 방법인지, 수능을 준비하는 학생들에게 조언 부탁한다.
▶결론부터 말하면 선행학습의 경우 10명 중 2명은 효과를 보고, 8명은 오히려 학습 의욕이 떨어진다. 선행학습은 학습 의욕을 꺾으며, 교실 붕괴의 주범이기도 하다.
학생들이 학원에서 대충 배우고 오니, 교사가 반(40명 기준)에서 15등 정도를 잡고 수업을 한다. 그러면 상위권 5명은 다 배워서 재미가 없으니 자고, 30~40등 학생은 쉽게 가르치든 어렵게 가르치든 관계없이 또 잔다.
학부모들이 이제는 좀 현명하게 투자를 해야 한다. 제가 보기에 수성구 학부모들이 서울 대치동 학부모보다 더 심하게 '묻지마 투자'를 하는 것 같다.
선행학습으로 기본 개념을 다지고 내 것으로 안 만든 학생은 문제를 보면 풀 수 있을 것 같다가도 정작 풀어보면 답이 안 나온다. 또 답지를 보면 고개는 끄덕이는데, 문제를 풀면 풀릴 것 같으면서도 답은 맞지 않다. 기본 개념을 곱씹어서 완전히 갖고 놀 정도로 만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기본 개념에 충실해야 어떤 문제가 나오든 해결할 수 있다.
학원에서 '적중', '족집게' 이런 표현을 쓰는데, 저는 족집게 이런 표현을 붙이는 사람도 잡아넣어야 된다고 본다. 수능은 교과서 기본 개념을 출제위원들이 항상 당해 연도에 새로 만든다. 그렇기 때문에 수많은 문제를 풀어서 어쩌다가 문제를 맞추는 것이 아닌, 기본 개념을 잘 이해해서 어떤 문제가 나와도 자신 있도록 공부해야 한다.
지금 재학생이라면 가장 느린 방법이 가장 빠른 길이다. 결국 이 겨울방학 때는 기본 개념과 원리를 되짚고 곱씹는데 8할 이상의 시간을 바치면 된다. 이 기본만 돼 있으면 나머지 문제 풀이는 한두 달만 해도 해결이 된다.
정리하면 수학, 과학의 경우 양보다는 기본 개념과 원리를 이해하고 내 것을 만드는 데 최선을 다해야 한다. 영어는 필요한 등급만큼 미리 실력을 쌓아놓으면 도움이 된다.
국어를 잘하기 위해서는 언어 감각, 독해력, 읽는 속도가 필요하다. 이 세 가지는 궁극적으로 독서를 통해 배양되는데 특히 '어휘력'이 중요하다. 어휘력이 부족한 학생은 국어사전을 옆에 두고 낱말을 하나하나 찾아보는 학습 습관을 길러야 한다. 이런 학습법은 결국 고득점과 연결된다.
-마지막으로 좋은 대학을 보내는 노하우를 압축해서 알려달라.
▶양육 방식에는 크게 '성장형'과 '고정형'이 있다. 자녀 교육에 성공하는 최고의 비법은 부모 자체가 '성장형'이 되는 것이다.
'고정형' 부모는 시험 치고 온 자녀에게 하는 첫 질문이 '몇 개 틀렸니? 다 맞췄니?'다. 반면 '성장형' 부모는 "오늘 시험 친다고 수고했다. 애썼다"고 한다.
자녀가 시험을 못 쳤을 때 고정형 부모는 "머리가 나쁘냐? 이 집안은 원래 수학을 못 한다"고 핀잔을 줘 아이가 좌절감을 갖게 한다. 그런데 성장형 부모는 "연습이 좀 덜 됐나 보다. 열심히 하면 잘할 수 있을 것"이라고 격려한다.
제 경우 큰 아이가 고등학교에서 첫 모의고사를 칠 때 아이 엄마에게 "아이가 집 문을 열 때 '시험 잘 쳤나', '몇 개 틀렸노' 절대로 이렇게 묻지 말라"고 특별히 당부했었다.
그냥 할머니가 이야기하듯 '욕봤다. 디제?(힘들지?의 사투리)' 이렇게만 하라고 했다. 그래도 한마디 더 하고 싶어 죽겠다면 '먹고 잘래? 그냥 잘래?'까지만 물어보라고 했다. '먹고 자겠다'고 하면 시험을 잘 쳐서 먹겠다는 것일 테고, '그냥 자겠다'는 말은 시험을 망쳐서 화가 난다는 의미일 것이기 때문이다.
자녀 교육에 성공하기 위해서는 부모가 인내하고 기다릴 수 있는 '지구력'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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