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진국이 민주적인 절차를 통해서 자국의 이익에 심대한 타격을 가하는 결정을 한 대표적인 예는 '브렉시트'(Brexit), 즉 영국의 EU(유럽연합) 탈퇴다.
영국은 2016년 국민투표 결과 51.9%가 EU 탈퇴에 찬성하고 2020년 정식으로 탈퇴하였다. EU 탈퇴 이후 영국은 생필품 공급 차질로 인한 물가 폭등, 기업 투자 둔화, 노동력 부족, 국제 금융 허브 지위 약화 등으로 경제대란을 겪고 있다. 경제뿐만이 아니다. 브렉시트를 주도한 집권 보수당 내의 잦은 지도부 교체, 지지도 하락, 조기 총선 등으로 정치적 혼란도 가중되고 있다.
그렇다면 영국 국민들은 왜 세계 2위의 경제공동체인 EU에서 자발적으로 탈퇴하였을까? 가장 흔히 언급되는 이유는 영국이 EU라는 거대한 공동체의 규정을 따르게 되면서 자국의 법, 국경, 경제에 대한 통제권을 잃었다고 느꼈기 때문이라고 한다. 브렉시트를 지지한 사람들의 구호가 '통제권을 되찾자'(Take Back Control)였던 이유다. 예를 들어 EU 내에서 이민이 자유로워지면서 동구권 등 상대적으로 가난한 지역의 이민자들이 영국으로 모여들어 임금을 낮추고 일자리를 빼앗아 가는 한편 복지비용을 증가시킨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브렉시트의 보다 근본적인 원인은 '지방색' 때문이었다. 2016년 국민투표 당시 투표에 참여한 영국 유권자의 51.9%가 EU 탈퇴에 찬성하였지만 지역으로 나눠 보면 탈퇴에 대한 찬반이 지역에 따라 확연하게 달랐음을 알 수 있다.
영국은 잉글랜드, 스코틀랜드, 웨일스, 북아일랜드 등 4개의 지역으로 나누어져 있다. 잉글랜드는 53.4%가 탈퇴에 찬성하였지만 스코틀랜드는 38%만 탈퇴에 찬성하고 62%가 탈퇴에 반대하였다. 웨일스는 52.5%가 탈퇴에 찬성하였지만 북아일랜드는 44.2%만 탈퇴에 찬성하고 55.8%가 탈퇴에 반대하였다. 결과적으로 영국이 EU를 탈퇴한 것은 가장 인구가 많은 잉글랜드가 탈퇴를 원했기 때문이다.
잉글랜드, 스코틀랜드, 웨일스, 북아일랜드는 언어도, 종교도, 문화도 서로 다른 지역들이며 아직도 각자의 '국가대표' 축구팀도 갖고 있다. 역사적으로 이 지역들은 서로 처절한 전쟁을 치르면서 반목해 오던 '나라'들이었다. 그러나 잉글랜드의 엘리자베스 1세가 후사 없이 죽자 그의 조카인 스코틀랜드의 제임스 6세가 영국의 제임스 1세로 즉위하면서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의 '통합 왕관'이 생기고 그 이후 북아일랜드 정복과 웨일스의 통합으로 '그레이트브리튼'(Great Britain)이라는 새로운 공동체가 형성된다.
대영제국을 건설한 것은 바로 이 '그레이트브리튼'이다. '해가 지지 않는 제국'을 건설하는 과정에서 잉글랜드, 스코틀랜드, 웨일스, 북아일랜드는 각자의 정체성을 지키면서도 강력한 연합을 구축함으로써 세계 최강국을 건설한다. 이 과정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한 것은 잉글랜드다. 인구도 가장 많을 뿐만 아니라 잉글랜드의 수도인 런던이 그레이트브리튼의 수도가 되었고 산업혁명을 주도한 것도 잉글랜드였다.
대영제국을 건설하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한 잉글랜드인들이 EU 탈퇴를 주도한 것은 역사적 아이러니다. 잉글랜드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대영제국이 해체되고 영국의 국제적인 영향력이 급격히 감소하는 가운데 영국이 EU라는 거대한 공동체에 가입하자 동요한다.
스코틀랜드, 웨일스, 북아일랜드 등은 잉글랜드가 주도하는 그레이트브리튼에 '합병'되면서도 작은 나라로서 자신의 정체성을 지키고자 노력해 온 결과 고유의 정체성도 유지하면서 보다 큰 연합의 일원으로서의 정체성도 정립할 수 있었다. 반면 잉글랜드의 정체성은 그레이트브리튼의 정체성 속에 용해되어 버렸다. 따라서 그레이트브리튼의 국력과 영향력이 감소하는 것을 가장 뼈아프게 느낀 것도 잉글랜드 사람들이었다.
그래서 자신들이 주도하던 연합인 그레이트브리튼에 대해서는 불만이 없던 사람들이 보다 큰 연합의 일부가 되면서 주도권을 상실하기 시작하자 EU를 탈퇴해 버린다. 결과는 그레이트브리튼과 잉글랜드 국력의 지속적인 감소다. 지방색이 국익을 해친 가장 적나라한 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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