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래는 토요일 새벽 안나에게 청혼을 해왔다. 신혼여행으로 함께 하와이에 가자고 했고 자기는 거기서 파도를 탈거라고 했다. 그때 그들은 여러 종류의 술을 섞어 마시고 똑바로 서 있지도 못할 정도였다. 하지만 안나는 정래가 했던 말들은 전부 기억할 수 있었다. 둘은 흔들리는 그네 앞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안나는 입고 있던 얇은 카디건을 벗어 머리에 둘러썼고 정래는 캔맥주 뚜껑 따개를 뽑아 안나의 새끼손가락에 끼워 주었다. 약지에는 맞지 않았던 것이다. 따개는 새끼손톱에 걸쳐져 우스웠고 그게 아니더라도 그들은 계속 낄낄대고 있었다. 늦봄의 새벽 공기는 쌀쌀했고 어두운 밤하늘은 조금씩 엷어지고 있었다. 그리고 서로의 입속에 혀를 집어넣었다.
안나는 지난 밤 이태원 클럽에서 정래를 처음 만났다. 윤 언니가 전활 걸어와 남친이랑 남친의 아는 동생이랑 같이 놀지 않겠느냐고 물어왔던 것이다. 그들은 이태원 사거리 횡단보도 앞에서 만났고 어수선하게 통성명을 한 뒤 곧바로 클럽으로 향했다. 그리고 술을 마시고 춤을 췄고 춤을 추고 술을 마셨다. 이어 밖으로 나와 호프집으로 가 맥주를 마시며 떠들어댔고 또다시 나와 24시 감자탕집에 들어가서 소주와 맥주를 말아먹었다. 가게의 큰 마루에는 손님들이 빼곡히 앉아있었고 모두 전투적으로 뼈를 뜯거나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그들도 마찬가지였다. 소주 일곱 병과 맥주 네 병을 비우며 오래 알던 사이처럼 떠들어댔다. 주인들은 감자국을 끓이느라 정신이 없어 보였고 누군가 일어나다가 엎어져 빈 병들이 나뒹굴어도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았다. 안나는 들떠 있었다. 한 번에 너무 많은 술을 마셨기 때문일 것이다. 아니면 윤 언니를 2년 만에 만나서인지도 몰랐다. 그것도 아니라면 버림받은 개처럼 그간 사람을 너무 오래 그리워했기 때문일 거라고 안나는 생각했다.
윤 언니와 남친이 담배를 피우러 나가자 좀 전의 흥분이 가라앉으며 시간이 느리게 흘러갔다. 그러다가 안나가 자기도 모르게 왜 안 오지, 하고 중얼거렸을 때 정래가 말했다.
걔들 안 와.
응?
모텔 갔을걸.
그래.
정래는 일정한 속도로 술을 마시는 중이었고 안나는 그런 그를 흘긋 바라보았다. 윤 언니가 없으니 흥이 깨졌고 이제 그만 돌아가야 할 시간이라고 느꼈다. 그때 정래가 점원을 불러 맥주 한 병을 주문했고 일어설지 말지 갈피를 잡지 못하는 사이 주문이 나왔다. 정래는 맥주를 글라스에 따라 들이키고는 기다렸다는 듯 내내 파도타기에 관해 떠들었다. 안나는 경청하는 척했지만 사실 지루하기만 했고 관심 밖의 이야기였다. 파도타기라니. 살면서 파도에 관해서 생각해 본 일이 없었다. 어쩐지 그것들, 파도니 서핑 보드니 모래톱이니 하는 말들이 사치처럼 느껴졌다. 안나는 술을 너무 마셨나 싶었고 졸음이 눈꺼풀 사이로 파도처럼 밀려왔다가 사라지곤 했다.
이윽고 그들은 밖으로 나와 감자탕 집 앞에서 잠시 흔들거리며 서 있었다. 안나는 약간의 구토의 기미를 느꼈으나 심각한 것은 아니었다. 어디 가까운 편의점에 가서 탄산수에다 숙취해소제를 섞어 마시면 괜찮을 것 같았다. 앞으로 걸어가자 정래가 뒤를 따랐고 안나는 뒤도 안 보고 건성으로 손을 흔들었다. 대충 네 갈 길 가라는 뜻. 갑자기 정래가 소리쳐 이름을 불렀고 안나는 고개를 돌렸다. 정래는 바지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은 채 천천히 다가왔다. 그 걸음걸이가 다소 무겁고 이상하게 어긋나있다고 생각한 순간 정래가 청혼을 해왔던 것이다.
안나는 놀이터 벤치에 앉아 동쪽 귀퉁이에서부터 은근히 밝아오는 하늘을 보고 있었고 정래는 자신의 어깨에 기대 졸고 있었다. 하룻밤 새 많은 일들이 일어났다고 생각했다. 그날은 처음인 것이 많았다. 클럽에 처음 가봤고 춤을 춘 것도 처음이었다. 남자애와 키스를 한 것도 술을 이렇게나 퍼마신 것도. 안나는 자신에 대해 모르고 있던 것들이 많다는 것을 깨달았다. 생각보다 술이 세다는 것과 남자애를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것. 안나에게 좋은 것이란 강한 것이었다. 술이 센 것도 강한 것이고 남자애를 두려워하지 않는 것도 강한 것이므로 안나는 스스로가 퍽 마음에 들었다.
졸다 깬 것은 소리 때문이었다. 그새 하늘은 환해져 있었고 도로에는 청소차가 소리를 내며 지나가고 있었다. 안나는 피로했고 지난밤의 장난이 시시하게 느껴졌고 남자애가 허벅지에 얼굴을 대고 자는 게 어색하기만 했다. 그리고 몹시 추웠고 어서 따뜻해지고 싶었다. 안나는 몸을 웅크린 채 잠든 정래를 들여다보았다. 파도타기를 좋아하고 느닷없이 결혼 하자고 조르는 이상한 남자애. 초면의 얼굴이었지만 어쩐 지 오래 본 듯 익숙했고 편편한 얼굴 위로 솟은 콧날이 조금 쓸쓸한 느낌을 주었다. 안나는 어째서 가슴 부근이 아려오는지 알 수가 없었다. 많은 사람이 그러하듯 오직 잠들었을 때만 드러나는 자기 근원이 어려 있는 순한 얼굴이기 때문일까. 안나는 돌연 추워 보이는 정래의 한 쪽 귀를 만져 주었다. 사실 그를 놓아두고 일어서려던 참이었는데 그런 생각이 사라진 건 귀를 만진 그 순간이었다. 정래를 방으로 데려가 곤히 자도록 둬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안나는 서울에서 겨우 두 계절을 지냈을 따름이었다. 처음 서울역에 도착한 날, 흐린 하늘에서는 굵은 눈이 펑펑 내렸다. 안나는 좋은 징조라고 여겼지만 한참이나 역내 의자에 앉아 헐거운 두 손을 내려다보았다. 어디로 가야 할지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던 것이다. 안나는 트렁크를 열어 시집을 꺼내 들었고 후륵 넘겨보았다. 시인은 어린 시절을 쌍문동에서 보냈고 쌍문이란 시어를 자주 썼다. 안나는 글자 표면을 괜히 검지로 문질러보고는 쌍문으로 가기로 마음을 정했다. 진주알처럼 환한 달 두 개가 나란히 떠 있는 곳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도착한 쌍문에는 여느 곳과 다름없었고 흐린 하늘에 달은 보이지도 않았다. 안나는 헤매다가 카페에 들어가 뜨거운 라테 두 잔을 마셨고 그러다가 입술을 깨물며 윤 언니에게 전활 걸었다. 발신음이 길게 이어졌고 당연한 듯 저쪽에선 답이 없었다. 몇 달 전 전활 걸었을 때 언니는 자신에게 기댈 생각은 하지 말라고 잘라 말했다. 그러나 그 말은 차갑기보다 건조한 편에 가까웠다.
나도 힘들어. 내 한 몸 건사하기도 힘들다고.
그제야 안나는 언니가 취했음을 깨달았다.
강해져야지.
안나는 정말이지 그게 무슨 말인지 잘 알고 있었다. 아마 언니도 겨우 살아내고 있을 것이었다. 세상의 모든 고아가 그렇듯이. 몇 년간 시설에서 함께 지냈다고 해서 그에게 뭔가를 요구할 수는 없었다. 언니와 안나는 아무 관계도 아니었다.
방과 일자리가 중요해.
언니는 혀가 꼬인 채로 말했다.
그거면 돼. 그거면 시작할 수 있어.
안나는 만으로 십팔 세가 넘어서 시설에서 나와야 했고 정부에서 나오는 독립 정착금 오백을 받았다. 그 외에도 따로 지니고 있던 이천만 원이 더 있었는데 오래전 숙부의 집을 나올 때 받은 돈이었다.
안나는 카페에서 버틸 만큼 버티다가 다시 거리로 나왔다. 퇴근길의 거리는 부산했고 지하철역 입구에는 한 무더기의 사람들이 흘러나왔다가 흩어지기를 반복했다. 밤을 지나기에는 찜질방이나 모텔이 적당할 것이었다. 그게 아니라면 밤새 운영하는 PC방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하지만 그런 곳에서 밤을 보낸다면 쓸쓸함을 견디기 어려울 것 같았다. 한참을 쏟아지는 눈을 맞고 서 있다가 결국 카페 옆 24시 패스트푸드점으로 되돌아갔다.
그 밤은 깊고 길었다. 햄버거 세트를 먹고 시를 읽고 다시 애플파이를 두 개나 먹었는데도 밤은 여전히 버티고 있었다. 안나는 트렁크에서 에세이를 꺼냈고 12페이지의 파란 밑줄을 읽어 내려갔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의 전부란 대수롭지 않은 한 가지 논점에 대하여 견해를 내놓는 것입니다. 그 의견은 다름 아니라 여성이 픽션을 쓰고자 한다면 돈과 자기만의 방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며…(버지니아 울프, '자기만의 방')
돈과 자기만의 방. 그것은 안나가 독립을 실행할 때 유념했던 두 가지였다. 안나는 그것을 주축으로 소위 미래라는 것을 계획하고 있었다. 미래는 모호하고 두려운 것이었지만 기술이 있다면 그럭저럭 지나갈 수 있을 것이었다. 당장 전쟁이 나도 써먹을 수 있는 기술을 배우고 싶었지만 아무래도 여자에겐 의료나 미용 혹은 미래와 밀접해 보이는 컴퓨터 분야가 좋을 것 같았다. 안나는 자신의 계획이 나무랄 데 없다고 생각했다. 그런데도 어쩐 일인지 자꾸만 올라오는 불안을 억눌러야만 했다. 안나는 창밖으로 흔들리며 떨어지는 눈송이들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기척을 느끼고 눈을 떴을 때는 직원이 매장 안을 청소하는 중이었다. 이윽고 밤이 지나간 것이다. 밖은 지난밤 내린 눈으로 온통 환했다. 안나는 그 흰빛의 힘으로 앞으로 걸어 나갔다. 시장 골목으로 들어가 백반을 먹었고 핸드폰으로 다시 한번 지역의 방들을 검색했다. 자신이 지닌 돈으로 갈 수 있는 방은 몇 개 없었고 그마저도 놀랍도록 비좁았다. 안나는 머플러를 동여매고 트렁크를 끌며 정처 없이 긴 골목을 걸었고 그 끝에 멈춰 섰다. 갑을 복덕방. 안나는 트렁크 곁에 오그리고 앉아 문이 열리기를 기다렸다. 그사이 귀가 추위로 얼었고 낙관적인 전망도 흐려지고 있었다. 하지만 다른 대안은 없었다. 흰빛이 시어 두 눈이 가물거리는 사이 등산용 패딩을 입은 노인이 나타났다.
안나는 노인이 타준 믹스커피를 홀짝이며 전기난로에 손을 녹이고 있었다.
몇 살인가.
열아홉이요.
그보다 어려 보이는데.
노인은 부스스한 얼굴로 나타나 이천오백만 원짜리 방을 얻고 싶어 하는 여자애를 가여워하는 것 같았다. 어쩌면 고아에게는 감추어도 드러날 수밖에 없는 표식이 있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그날 안나가 낡은 빌라의 반 지층에서 한 칸의 방을 구할 수 있었던 것은 오로지 노인의 호의 덕분이었다. 그는 집주인에게 연락해 서둘러 계약을 끝내게 했고 마치 손녀를 부탁하듯 주인에게 잘 부탁한다고 말했다. 집주인은 먼젓번 살던 사람들이 모두 잘 되어서 나갔다고 큰 집으로 갔다고 소리를 높였다. 안나는 노인과 집주인에게 감사하다고 고개를 숙였다.
그날 안나는 방에서 헐렁한 모 코트를 덮고 밤을 보냈다. 벽지며 장판에서 풍겨오는 시큼한 새것의 냄새를 맡으며 잠이 들었다. 안나는 그 방에서 처음으로 마음을 놓을 수 있었다. 그 작은방이 자신에게 어떤 의미를 갖는지 스스로도 가늠할 수가 없었다. 지상에 한 칸의 방을 갖게 된다는 것은 하나의 우주를 갖는 것과 다름없었다.
안나의 방에 당도하자마자 정래는 이불 속으로 들어가 내내 잠만 잤다. 오래 불면증을 앓던 사람처럼 달고 곤한 잠이었다. 한번은 잠이 너무 깊어 코에 귀를 대어봤을 정도였다. 정래는 꼬박 하루를 자고 일어나서는 라면이 먹고 싶다고 했다. 안나가 파와 계란을 넣고 라면을 끓여주자 그 애는 허겁지겁 입속에 면발을 쑤셔 넣었다. 그러다 갑자기 먹는 걸 멈추고 안나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나는 타는 거라면 뭐든 자신 있어.
정래의 말은 비장했다. 마치 그것이 안나가 꼭 기억해야만 하는 중요한 일이라도 되듯이.
그는 이삿짐센터에서도 일해 봤고 택배 일도 해봤지만 적성에 맞지 않았고 역시 배달 일이 제일 나았다고 했다. 그 일이 좋은 점은 오토바이를 탈 수 있기 때문이라고. 그리고 다시 입속에 음식을 욱여넣었고 남는 찬밥이 있으면 좀 달라고 했다.
라면을 먹은 정래는 다시 드러누웠고 그렇게 방에서 이틀을 더 미적대다가 결국 눌러앉았다. 이틀이 지나자 모든 것이 애매해졌고 안나는 그와 현실적인 대화를 나눌 타이밍을 놓쳤다는 것을 깨달았다. 정래는 다시 배달 일을 시작할 거라고 했고 방값이나 생활비를 분담하겠다고 호기롭게 말했다.
안나는 낮에는 동네 편의점에서 일했고 야간에는 간호학원엘 다녔다. 학원에서 안나는 허리를 세우고 수업을 들었지만 기초 영양이나 임신성 고혈압이란 활자 아래에다가 자꾸만 시 같은 걸 썼다. 정래는 오후부터 새벽까지 배달 일을 했다. 신나게 오토바이를 타고 도로를 누비다 오는 것이었다. 서로 교차해서 밤과 낮을 일하는 터라 그들은 한 방에 지내면서도 마주치기 어려웠다. 안나가 출근할 땐 정래가 자고 있었고 정래가 들어올 땐 안나가 자고 있었다. 그들은 그렇게 적당한 거리에서 서로의 안녕을 확인하며 생활하고 있었다.
하루는 정래가 편의점으로 찾아왔다. 무심코 밖을 내다보았을 때 정래가 파라솔 밑에서 졸고 있었다. 안나는 정래의 리스 오토바이 뒤에 탄 채 도로를 달렸다. 도로에서 정래는 왕처럼 느긋했다. 속력으로 허세를 부리지도 핸들 조작으로 기교를 부리지도 않으면서 적당한 속력으로 흐름을 타고 있을 따름이었다. 안나는 그의 등에서 안전함과 편안함을 느꼈다. 오토바이는 정말 오랜만이었다. 어릴 적 아버지의 등에 붙어 시내를 돌던 기억이 반짝 떠올랐다. 아버지의 체취나 등으로 울리던 목소리 같은 것들. 그 뭉근한 울림이 안나는 좋았다. 슬프고 따뜻한 기억. 하지만 오래되어 감각으로만 남은 희미한 기억이기도 했다.
그들은 식당에 들어가 돼지고기를 구워 실컷 먹고 다시 오토바이에 올라타 시내를 돌아다녔다. 버스를 타고 보는 서울과 택시를 타고 보는 서울은 달랐는데, 오토바이를 타고 보는 서울도 역시 달랐다. 더 크고 더 선명하게 보였다. 완연한 여름이었다. 여기 이 도시에서 맞는 안나의 첫 여름. 그리고 완전한 여름이기도 했다.
그들은 한강에 가서 땀을 흘리며 뜨거운 라면을 먹었고 콜라와 커피도 마셨다. 그런 뒤 안나는 정래가 이쪽 끝에서 저쪽 끝까지 달리는 것을 지켜보았다. 그 애는 이유도 없이 소리를 지르며 전속력으로 내달렸다가 되돌아오곤 했다. 그사이 천천히 해가 졌고 하늘빛은 불그스름해졌고 그러다 짙은 남빛으로 물들어갔다. 정래는 강물을 바라다보며 말했다.
서핑을 하다 보면 가끔 완벽한 파도를 만날 때가 있어.
또 파도 얘기였다.
그런 종류는 저쪽에서 밀려올 때부터 감이 와.
안나는 어떻게 아냐고 물었고 정래는 슬쩍 웃으며 그냥 안다고 했다.
내 키의 세 배를 넘는 파도를 마주한 순간 알게 된다?
뭘?
이것이 내가 그토록 기다렸던 완벽한 파도라는 거. 그 파도 속에서 나도 완벽해지리라는 거.
정래는 파도에 올라타서 출렁이는 물 위를 미끄러질 때면 내가 파도인지 파도가 나인지 알 수가 없다고 했다. 나를 완전히 벗어난다고 했다.
상상이 가?
물론 상상이 안 갔다. 안나는 파도를 몰랐다. 그런 것들을 생각할 만큼 여유롭지 못했다. 그러니까 안나의 삶은 완벽한 파도를 만나는 것을 고대하는 것과는 무관했다. 칠천 원짜리 치즈 돈가스를 먹고 싶은데 천 원을 아끼기 위해 그냥 돈가스를 먹는 것에 익숙해져야 하는 생활이 있을 뿐이었다. 천 원을 싸게 사면 기뻐하고 천 원을 더 주고 사면 실망하는 그런 삶. 그 가성비의 삶에서 안나는 자꾸만 납작해져만 갔다. 그 납작함이 주는 비루와 협소에 대해서는 이야기하고 싶지 않았다. 안나는 파도와 파도타기에 관한 정래의 이야기를 듣는 게 좋았다. 그 애의 이야기에는 눌린 마음을 둥글게 부풀게 하는 어떤 것이 있었다. 이제 하늘은 완전히 어두워졌다. 그들은 때때로 소리를 내며 철교를 지나는 열차를 올려다보았다. 강은 검은 기름처럼 일렁이고 있었고 그 위로 도시의 불빛들이 조용히 수런거렸다.
안나는 출근을 위해 현관을 나서며 지갑을 열어 보았다. 예상대로 돈이 비어 있었다. 정확히 삼천이백 원. 안나는 암호를 풀 듯 지갑 속을 골똘히 바라보았다. 언제부턴가 지갑에서 현금이 비기 시작했다. 많은 돈도 아니고 만 원이나 이만 원 가끔은 이천삼백 원 또는 오늘처럼 삼천이백 원일 때도 있었다. 지갑에 손을 댈 수 있는 사람은 아무리 생각해도 정래밖에 없었다. 집을 나서며 안나는 잠든 정래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삼천이백 원의 액수만큼이나 쿨쿨대며 자는 그 애의 얼굴 또한 암호처럼 보였다.
이 문제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안나는 필요 이상으로 정직했는데 그것은 오랜 기간 다른 사람에게 의탁해 살아온 사람이 지닌 결벽증과도 같은 것이었다. 타인의 신뢰를 잃는 순간 인생 전체가 흔들리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도덕적이기보다는 전략적인 습관에 가까웠다. 그러므로 정래를 이해할 수가 없었다. 장난인지 도벽인지도 구별도 되지 않았다. 아니면 날 우습게 보는 건가. 자신을 우습게 여긴다는 생각이 들자 안나는 기분이 상했다. 방에 밀고 들어오는 걸 용인하니까 그래도 된다고 생각한 건가. 정래를 몰랐던 것일까. 하긴 안나는 정래에 관해 아는 것이 없었다. 윤 언니 남친의 친구라는 것과 뭐든 잘 탄다는 것밖에는. 그럼에도 안나는 정래가 지닌 어떤 절박함 같은 것을 이해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안나는 조금 더 지켜보기로 했다. 사라지는 돈이 얼마 되지 않기도 했다. 하지만 액수가 중요한 게 아니잖아, 안나는 반문했다. 게다가 정래는 처음의 장담과는 달리 지금껏 방세나 생활비를 내놓거나 분담한 적이 없었다. 이용당한 것일까. 순간 안나는 자신이 매우 어리석고 순진한 사람처럼 느껴졌다. 당장이라도 그를 방 밖으로 밀어내고 싶었지만, 오랫동안 남의 방을 전전하며 살아온 자신이 그런 짓을 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안나는 부모님의 사고 정황을 9시 뉴스를 통해 알았다. 그러니까 병원 로비의 커다란 텔레비전에서였다. 고속도로를 달리던 25톤 트럭 조수석에서 한 여성이 갑자기 문을 열고 도로 위로 떨어지며 급정거를 했고 뒤따르던 차들이 미처 속도를 줄이지 못해 일어난 5중 연쇄 추돌 사고였다. 트럭을 들이받은 첫 번째 용달차가 부모님의 차였고 그들은 그 자리에서 사망했다고 전해 들었다. 안나는 힘든 시간을 겪었다. 그러나 이후로 많은 날이 지나갔다. 여러 방을 전전하다 보면 정말로 어려움을 견딘다는 것이 무엇인지 알게 된다.
한 때 안나가 머물렀던 곳은 숙부의 아파트에 있는 사촌의 방이었다. 숙부는 Y시의 공무원이었고 숙모는 인근 중학교의 수학 교사였다. 그리고 사촌은 안나와 동갑내기 중학생으로 같은 학교에 다녔다. 사촌과는 어릴 적, 여름에는 수영장에서 겨울에는 썰매장에서 함께 놀던 기억이 있었다. 물론 부모님이 살아계실 때의 이야기였다. 학교에서 사촌은 평범했다. 더없이 평범해서 있는지도 없는지도 모르게 존재했던 그 애가 집으로 돌아오면 안나를 방에 가두고 때렸다.
처음 사촌에게 맞았을 때 안나는 얼떨떨한 기분이었다. 그러니까 아무런 전조나 징조도 없이 폭력을 당했을 때 안나는 그저 커다랗고 딱딱한 것에 쾅 하고 치인 기분이었다. 야, 잔다고, 불 끄라고. 사촌은 그렇게 말했고 안나가 뭐라고 응수하기도 전에 왼쪽과 오른쪽 뺨을 번갈아 맞은 것이다. 처음에는 안나도 맞섰고 저항도 했지만 사촌이 생전 들어본 적도 없는 욕 사이로 거지 같은 게, 우리 집에 얹혀사는 주제에, 라는 말을 들었을 때 몸에서 힘이 죽 빠져나가는 걸 느꼈다. 안나도 스스로 그리 만만한 사람은 아니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어쩐 일인지 그 말에 대항할 의지를 잃었다. 안나는 그 일을 숙부나 숙모에게 말하지 않았다. 조용히 덮고 가고 싶었고 어쨌든 숙부는 아버지의 동생이었으므로 아무리 자신의 딸이지만 맞는다는 걸 알면 마음이 편치 않을 것 같았다.
사촌은 방에서 주기적으로 안나를 때렸고 밖에 나가면 예의 얌전한 여중생으로 돌아갔다. 한 번 그리되니까 때리는 게 쉬워진 것 같았고 그런 반복이 그만 고정되어 버렸다. 책상에서 소파에서 침대에서 혹은 화장실이나 식탁에서 사촌은 갑자기 발끈해서 발로 차거나 주먹을 사용하거나 손에 잡히는 대로 뭔가를 던졌다. 그때 안나는 괜찮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지상에서 오직 둘만이, 오직 안나와 사촌만이 맞고 때리는 사이였을 때는. 둘 사이의 일이었으므로 그건 싸움으로 분류될 수 있었다. 싸움은 양자가 공평하게 하는 것이므로 치욕이 덜했다. 목에 붉은 손자국이 남고 머리에 피딱지가 앉고 앞니가 흔들리고 허벅지에 피멍이 들었지만 그래도 그때는 괜찮았다.
더 이상 괜찮지 않았을 때는 그날 이후였을 것이다. 뭐 때문인지는 모르겠으나 사촌이 느닷없이 폭발했고 안나는 방에 열기와 습기가 가득할 때까지 맞았다. 그러다 어느 순간 사촌이 더 때리지 않았고 웅크려 있던 안나가 고개를 들었다. 집에 아무도 없었는데 어느 순간 문간에 숙부가 서 있었다. 안나의 눈이 숙부의 눈과 마주쳤다. 무엇을 바랐던 걸까. 숙부는 시선을 피했고 가만히 문을 닫았다.
그날 이후 사촌은 숙부 내외가 집에 있을 때도 때렸다. 가령 저녁 식사 전에 방에서 실컷 때린 사촌이 먼저 나가 식탁에 앉으면 얼마 후 헝클어진 머리를 대충 매만진 안나가 벽을 짚고 걸어 나와 앉는 식이었다. 밥을 먹는 사이사이 안나가 손을 떨고 한쪽 눈두덩이가 시시각각 부풀어 오르는데도 숙부와 숙모는 한마디도 하지 않은 채 식사를 했다. 사촌은 뭔가를 해소한 듯 후련한 얼굴로 밥을 잘도 먹었고. 식탁은 조용해서 거실의 텔레비전 소리만이 들렸고 그 소리가 먼 데서 들려오는 것처럼 아득하게 느껴졌다.
안나는 그때 울리던 텔레비전 소리와 식기에 부딪히는 젓가락질 소리와 음식물 씹는 소리를 기억한다. 그 소리 밑에 깔린 침묵을 기억한다. 그 침묵은 뾰족하지도 않고 아프게 할 수도 없고 아무것도 아니고 그저 형상 없는 무엇일 뿐인데도 안나는 그것에 영혼이 통째로 찢기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한 번은 담임이 뭔가를 의심한 적이 있었다. 다래끼가 났다며 안대를 쓰거나 왼팔을 깁스한 채로 등교하거나 팔다리에 이런저런 상처가 떨어질 날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담임은 의문을 갖고 집에 전화했고 숙모와 통화를 한 뒤 그 의문은 손쉽게 풀렸다. 그 후로 사촌은 얼굴에는 손을 대지 않았다. 겨울에는 그런 걸 고려하지 않았지만 여름에는 등이나 엉덩이 위주로 노출되지 않는 부분만 집중했다.
그 폭력에 대해 숙부와 숙모와 침묵으로 일관했기에 안나도 침묵으로 답했다. 그때 안나는 사촌의 방에서 밀려나는 게 두려웠다. 세상에는 한 칸의 방, 오직 사촌의 그 네모난 방만이 존재하는 것 같았고 나머지는 온통 벼랑인 것만 같았다. 안나는 밀려나면 끝이라고 바닥을 알 수 없을 정도로 추락할 것이라고 믿었고 그 추락에 대한 공포 때문에 사촌에게 맞는 것 따위는 아무것도 아니다, 라고 결론지었다.
그런데도 결국은 방에서 밀려나고 말았다. 응급실에 실려 갈 정도로 심하게 맞았기 때문이었다. 사촌이 뭔가로 머리를 내리치는 것을 끝으로 안나는 정신을 잃었다. 안나가 다시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응급실이었다. 숙부는 굳은 얼굴로 안나를 내려다보다가 이제 더는 못 참겠다, 라고 말했다. 사촌의 폭력이 아니라 안나의 존재를 못 참겠다고. 갈비뼈 두 대가 나가고 머리가 찢어지고 팔다리가 멍으로 가득한 안나를 두고. 그때 안나는 혀가 완전히 말라서 소리를 낼 수가 없었다. 물을 마시고 싶었지만 말이 나오지 않았다. 그래도 말을 할 수 있었다면 아마도 잘할게요, 노력할게요, 싸우지 않을게요, 이런 말이지 않았을까. 아직도 안나는 그 말을 해보지 못한 것을 후회하고 있었다.
퇴원 후 안나는 숙부의 집을 떠나 C시의 어느 고아원으로 들어갔다.
오랜만에 윤 언니가 전활 걸어왔고 정래에 관해 뜻밖의 정보를 들려주었다. 그 애가 공부를 많이 해서 머리가 돈 부잣집 아들이란 것이었다. 심리치료를 받고 정신병원을 들락거리다 아예 집을 나왔고 부모는 그런 아들을 그저 방관하는 중이라고 했다. 안나는 그 말들을 믿을 수 없었는데 그날도 언니는 어김없이 술에 취해 횡설수설이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안나는 조금 충격을 받았는데 그 이유가 무엇인지는 자신도 잘 알 수가 없었다. 다만 뭔가 끝을 봐야 할 때라고 생각되었다. 정래는 한 푼도 내놓지 않은 채 방에서 생활하는 데다 자신의 지갑에까지 손을 댄다. 그것은 용납할 수 없는 몰염치한 짓이 아닌가. 그래놓고 집으로 돌아가 버리면 그만이지 않겠는가 말이다.
그래서 모처럼 함께 쉬는 날 아침, 안나는 정래에게 심상하게 말했다.
언제쯤 방에서 나갈 생각이야?
정래는 옆구리를 찔린 사람처럼 입을 조금 벌렸다.
미안해.
미안할 건 없고.
안나는 쫓아내는 사람이 되는 게 싫어서 시선을 피했고 정래는 무슨 말을 하려다 그만두었다. 한동안 아무 말도 오가지 않았는데 그 때문에 정래는 안절부절못했다. 안나는 그 애의 불안을 도와주지 않았고 자리에서 일어나 설거지를 했다.
설거지 중에 느닷없이 정래가 뒤에서 껴안았다. 그간 같이 살면서 한 번도 없던 일이었다. 같은 방에서 지낸 이후로 정래는 어떤 식으로든 무리하게 밀고 들어오지 않았다. 안나는 그것이 나약함 때문이라고 생각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존중이란 생각이 들기도 했다. 사실 가깝게 붙지도 않고 멀리 가지도 않는 정래가 좋았다. 그것이 안나로 하여금 두렵게 만들지도 외롭게 하지도 않게 만들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안나는 그러는 게 싫어서 몸을 비틀어 빠져나오려 애썼다. 그러면 그럴수록 정래는 두 팔에 힘을 주었다. 안나를 바닥에 넘어뜨리더니 목덜미에 얼굴을 묻었고 치마 아래로 손을 넣었다. 안나는 어이가 없었고 화가 치밀었다. 그래서 이가 흔들릴 정도로 어깨를 깨문 뒤 밀치고 일어섰다. 정래는 안나의 다리를 붙잡아 균형을 잃게 했고 허리 위로 올라탔다. 그렇게 그들은 뜨거운 침묵 속에서 닥치는 대로 서로 때리고 맞았다.
먼저 울음을 터트린 건 정래였다. 그제야 안나는 자신의 코에서 피가 흐른다는 것, 그 피가 그치지 않아 정래가 무서워한다는 것을 알았다.
넌 내게 관심도 없지?
정래는 벽으로 물러나 아이처럼 계속 울어댔다.
지갑에서 돈이 없어져도, 내가 사라져도 상관없는 거지?
그만 울어.
가슴이 파도처럼 솟았다가 떨어지길 반복하는데도 안나는 지그시 말했다. 흥분이 가라앉질 않아서 그저 바닥에 누워 있었다. 정래는 자신의 점퍼를 가져와 안나의 다리에 덮어주었고 수건을 꺼내와 얼굴을 닦아주기도 했다. 안나는 손가락 하나 까딱할 기운도 없었다. 피는 여전히 그치지 않았다.
정래가 뭔가를 물어왔지만 안나는 듣고 있지 않았다. 안나는 25톤 트럭 조수석에 타고 있던 여성을 생각하고 있었다. 어째서 고속도로 한복판에서 차 문을 열고 뛰어내리기로 작정한 것일까. 그러나 그 이유를 알지 못했고 알고 싶지도 않았다. 다만 인생이 본격적으로 꼬이기 시작한 건 그 순간부터라는 생각을 했다. 여자가 차 문을 열고 도로로 뛰어내린 그 시점부터. 죽으려면 어디 가서 곱게 죽지 하필 달리는 트럭에서 뛰어내릴 건 뭔가. 하지만 안나는 종종 그때 뛰어내린 여성이 자신이란 생각을 한다. 그녀의 추락이 곧 자신의 추락이 아니었을까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나를 버릴 거지?
조용히 해.
안나는 고개만 돌려 수건을 집어 들고 코밑에 흐르는 피를 훔쳐냈다. 방은 피로 얼룩지고 더러워졌을 것이다. 나의 우주가 얼룩지고 더러워졌을 것이다. 안나는 이를 악물었다.
너도 나를 버릴 거지? 그럴 거지?
정래는 몇 번이나 그렇게 물어왔다.
일요일 새벽, 안나는 고아원에서 나와 시외버스 터미널로 향했고 Y시로 가는 첫차를 탔다. 하늘은 아직 캄캄했고 안나는 가슴에 가방을 껴안고 있었다. 가방 속에는 칼이 있었다. 시장 상회해서 구입해 신문지로 둘둘 말아 청테이프로 고정한 부엌칼이었다. 칼을 품고 다닐 적에 안나는 자신의 몸이 죽 펴진 것처럼 생각되었다. 그러니까 구부정하게 눌린 몸이 펴져서 드디어 사람다운 사람처럼 머리꼭지가 하늘을 향해 서게 된 것 같았다. 학교에서나 시설에서나 생활도 원만해져 갔다. 안나는 가끔 소리 내어 웃었고 친구들을 사귀었고 말을 많이 했다. 까닭 없이 두렵고 불안할 때면 어둠 속에서 홀로 일어나 칼을 배게 밑에 넣어두었다. 칼은 혼란과 불안의 목을 댕강댕강 잘라주었고 그러면 다시 원래의 그 차갑고 명징한 정신으로 돌아가게 되는 것이다. 안나가 칼을 품고 다닌 목적은 단 하나였다.
너희들 앞에서 나를 죽이겠다.
안나는 그 일념 하나로 칼을 품고 생활했다. 그 행위의 모델로는 일본의 무사를 세웠는데, 머릿속에서 안나는 무릎을 꿇고 비장한 얼굴로 자신의 배에 칼을 찔러 넣어 돌렸다. 그 생각 중에도 안나는 이를 악물었고 고통 때문에 휘청이는 것 같았고 갈라진 복부 사이로 피가 원한처럼 흘러넘치는 것을 보았다. 그러면 그들은 울거나 소리치거나 바닥에 이마를 찧었고 안나는 고통 때문에 두 눈을 쉴 새 없이 깜박이면서도 그들을 끝까지 바라보는 것이었다.
버스 정류장에서 내리자마자 안나의 몸은 기억보다도 선행해 앞으로 나아갔다. 붉은 보도블럭이 깔린 가로수 길은 오래 신어 길들인 운동화보다 익숙했다. 안나는 길을 따라 아파트 단지로 들어섰고 곧장 테니스 코트로 향했다. 코트 주위에는 관목이 빽빽해서 안에서는 동 입구가 훤히 보이면서도 바깥에선 안쪽이 잘 보이지 않았다. 안나는 안쪽 벤치에 앉았고 입구를 주시했다. 일요일 아침이면 그들은 자신들의 신에게로 갔다. 그들은 독실했고 예배를 거른 적이 없었다.
예상된 시간에 그들이 나타나자 안나는 숨을 멈추었다. 불쑥 드러난 숙부와 숙모와 사촌은 승용차를 타고 단지를 떠났다. 안나는 떠나는 차의 뒤꽁무니를 눈도 깜박이지 않고 바라보았다. 계획은 단순했다. 그들이 기도를 끝내고 점심을 먹고 돌아오면 십오 분 후에 올라가 초인종을 누르는 것이었다. 숙부는 오랜만에 찾아온 안나를 집 안으로 들일 것이다.
안나가 아파트에 올라가 문 앞에 선 것은 그저 지루했기 때문이었다. 도어락 번호를 누르자 문은 전자음을 내며 무심하게 열렸다.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다. 안나는 놀랐고 그것이 자신을 얼마나 취급하지 않았는가에 대한 반증처럼 여겨지기도 했다.
천천히 안으로 들어선 안나는 조용히 집 구석구석을 살펴보다가 이윽고 가방에서 칼을 꺼냈다. 신문지를 벗겨낸 칼을 식탁에 올려놓았다. 의자에 앉아 은빛의 칼, 그 끝을 바라보았다. 그것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여기는 달라진 것이 하나 없구나.
정말이었다. 모든 것이 예전 그대로였다. 무엇보다도 사촌의 방이. 안나는 그 좁은 방을 움켜쥐고 있던 자신의 마음을 생각했다. 멀리 떨어져 나왔음에도 결국 살아내고 있는 자신을 자각하고 있었다. 방들은 조용했고 오래전의 폭력 따위는 잊은 듯 평화로웠다. 안나는 그 적막 속에서 칼을 보기만 했고 마음을 다잡고 있었다. 시간이 천천히 흘러갔다.
시간이 흐를수록 안나가 깨달은 것은 모든 것이 끝났다는 것이었다. 마음은 응집되지 못하고 흩어져있었다. 그게 아니더라도 안나는 시를 쓰고 있었다. 시가 어떻게 왔는지는 모르겠으나 어느 날 갑자기 안나에게로 왔고 그래서 마음은 물러질 대로 물러져 있었다. 더 물러지기 전에 실행하려고 왔지만 이미 늦어버렸음을 식탁에 놓인 칼끝, 그 궁극의 점 앞에서 알았다. 시와 칼은 양립할 수 없었다. 둘 중 하나는 버려야만 했다. 자신은 그 차갑고 단단한 칼끝을 배에 찔러 넣을 수 없었다. 안나는 두려웠고 아름다움을 좆고 싶었고 어찌됐건 살고 싶었다. 서서히 두 눈에 눈물이 차오르기 시작했다.
안나는 비틀거리며 의자에서 일어났고 어찌할 바를 모른 채 서 있다가 거실에 주저앉았다. 너희들 앞에서 나를 죽이겠다.
결국 그 말을 토해내고 말았고 두 주먹을 움켜쥐었다. 그리고 그렇게 엎드린 채 오래도록 통곡했다.
이윽고 안나는 식탁에 칼을 놓아둔 채 숙부의 집을 떠났다.
정래는 여름이 다 가도록 소식이 없었고 안나는 지난날의 생활로 돌아갔다. 고요하고 무탈한 날들이었다. 곧 간호 조무사 시험을 앞두고 있었고 예상대로라면 합격할 것이었다. 그러면 좀 더 단단하게 지상에 뿌리를 내리게 되리라.
여름 끝에 생긴 버릇이 있다면 볼품없고 값싼 물건들로 방을 장식하는 일이었다. 그런 일들이 소용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마음이 허전해 견딜 수가 없었다. 쉬는 날 오전부터 택배가 오기 시작했고 안나는 받은 택배에서 커튼을 꺼내 창에 달고 있었다. 화면에서 본 커튼 빛깔은 분명 이른 봄의 개나리 빛이었으나 실제 받아보니 봄은커녕 흐리고 사위어가는 가을의 노란빛이었다.
실망감을 누르고 천천히 커튼을 다는데 문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오늘 도착할 택배가 더 남았기에 안나는 급한 마음에 체인을 건 채로 문을 열었다. 그러나 거기에 있는 것은 택배가 아니라 정래였다.
안녕?
정래는 뻔뻔하게 인사를 했고 웃는 얼굴이었다. 여름 동안 바다에 나가 파도를 탔던 것일까. 얼굴빛이 약간 어두워진 것 같았다. 정래는 들어가도 되냐고 물어왔다. 안나는 망설였지만 이내 걸었던 체인을 빼고 문을 열었다. 얼마 후 그들은 방에 어색하게 서 있게 되었다. 마치 처음 그 방에 들어온 사람들처럼. 서로의 얼굴을 외면한 채 어정쩡하게 있다가 먼저 몸을 움직인 건 정래였다. 창 쪽으로 다가가 늘어진 커튼을 달기 시작한 것이다. 안나는 그런 그를 지켜보다가 차를 끓이기 위해 전기 포트에 물을 받았다. 그러고 보니 한집에 살면서 한 번도 함께 차를 마신 적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안나. 정래가 조용히 안나를 불렀다. 그는 등을 진 채 여전히 커튼을 달고 있었고 안나는 포트 위로 피어오르는 연기를 보고 있었다.
궁금한 게 있어.
정래가 말했다. 안나도 궁금한 게 있었다. 그간 묻고 싶었지만 묻지 못하고 마음에 담아 둔 말들이었다.
감자탕집 앞에서 결혼하자던 말이 진심이었는지. 어떤 까닭으로 그런 말을 한 것인지 묻고 싶었다. 그리고 그날 놀이터에서 일어난 일들을 기억하고 있는지 아니면 술에 취해 조금도 기억하지 못하는지에 대해서도. 그 새벽 어디에 피었는지 바람이 불 적마다 맡아지던 라일락 향기와 머리 위에 점점이 박혀 있던 몇 개의 흐린 별들을 기억하는지. 함께 마셨던 캔맥주의 상표명과 손톱에 끼웠던 따개의 행방을 아는지. 그리고 볼 수도 들을 수도 만질 수도 없지만 분명히 존재하는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그것이 너와 나 사이에 존재하게 될 가능성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이 있는지 안나는 자못 궁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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