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37년에 베네치아에서 최초로 대중 오페라 극장인 '산 카시아노'가 문을 연 후 오페라 공연은 이탈리아의 대도시로 빠르게 퍼져나갔다. 오페라 공연이 대중의 인기를 얻게 되자 공연을 통해 수익을 창출하고자 하는 사람들은 극장을 짓기 시작했으며, 이들은 수익을 극대화하기 위해 축제 기간에만 공연을 허가하는 교회의 규제를 피하려고 노력했다. 가톨릭교회의 중심지로 교황이 정치적, 영적 권위를 행사한 도시였던 로마도 이를 피할 수 없게 되자, 교황청은 극장으로 인한 로마의 세속화에 맞서는 정책을 펼쳤다. 하지만 세력이 강해진 귀족 가문의 세속적 욕구는 이러한 교황의 노력을 방해했다. 귀족들은 자신들의 삶에 오락성과 화려함을 더 하도록 극장에 사교적 요소를 도입하고 오페라 무대에 여성을 등장시켰다.
당시 로마의 정치 지형은 족벌주의를 바탕으로 교황 가문에 권력이 집중되도록 하는 구조였었다. 삼촌이 추기경이 되었다가 교황으로 선출되고 또 교황은 조카를 추기경으로 임명하곤 했으며, 세력을 얻은 귀족들은 권력을 과시하기 위해 건축가와 예술가들을 동원했다. 물론 결과적으로는 예술의 발전에 도움이 되었지만, 이들의 예술 후원은 자신의 우월성을 주장하는 수단이었다.
이런 시대적 배경에서 스웨덴의 여왕을 지냈던 크리스티나는 오페라 애호가이자 극작가였던 클레멘트 9세 교황으로부터 상시 공연 면허를 얻은 후 '토르디노나 교도소'의 땅을 임대해 극장을 지었다. '토르디노나 극장(Teatro Tordinona)'이 1671년에 로마의 첫 대중극장으로 문을 연 후 폐쇄되기까지의 26년 동안 클레멘트 9세, 클레멘트 10세, 인노센트 11세, 알렉산더 8세, 인노센트 12세 등 모두 다섯 명의 교황이 교체됐으며, 극장에 대한 이들의 인식은 서로 달라서 관용과 엄격을 왔다 갔다 했다. 그러던 중, 1677년에 이 극장의 여성 출연자를 둘러싼 추문에 격노한 인노센트 11세는 난잡함과 타락의 온상으로 여겨졌던 여성 분장실을 벽이 없는 개방 공간으로 만들라고 지시했다. 이전에는 여성 분장실 옆에 남녀가 만날 수 있는 방이 따로 있어서 휴식 시간에 이용했다고 한다. 새로이 선출된 교황은 족벌 세력들을 타파하고자 했기에 당연히 귀족들의 일탈 공간에 적대적일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의 후임인 알렉산더 8세는 극장에 호의적이었다. 알렉산더 8세의 사망으로 새로운 교황으로 선출된 인노센트 12세는 전임자와는 달리 인노센트 11세의 정책을 이어 나갔으나, 공연을 금지하지는 않았으며, 오히려 극장에 기금을 기부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성직자들의 권고에 따라 '토르디노나 극장'을 폐쇄할 수밖에 없었다.
그로부터 300년이 훨씬 지난 지금의 이탈리아 오페라 극장들은 또 다른 이유로 폐쇄의 위기에 처해 있다. 재정적인 이유다. 가장 어려웠던 적은 베를루스코니 정부 때로서, 2010년대 들어 오페라하우스에 대한 정부의 지원이 대규모로 줄어들자, 밀라노의 '라 스칼라'와 베네치아의 '라 페니체'를 포함하는 4개의 오페라하우스를 제외한, 이탈리아의 많은 오페라하우스들은 문을 닫아야 할 지경에 내몰렸었다. 이번 달 초에 있었던 '이탈리아 오페라(Italian Opera Singing)'의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 등재가 재정적 어려움을 겪는 이탈리아의 오페라하우스를 구하는 계기가 될 수 있을까? 그렇지도 못한 우리나라의 오페라하우스들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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