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춘추칼럼] 처음 되어본 사람

심윤경 소설가

심윤경 소설가
심윤경 소설가

한 해를 돌아보니 늘 그러하듯이 2023년에 좋은 일도 나쁜 일도 섞여 있었다. 여러가지 일들 중 하나는 1972년부터 지금까지 한번도 일어나본 적이 없는 일이었다. 한번도 일어나본 적이 없는 일이 일어난 해로서 2023년은 분명 의미 있는 한 해가 되었다. 나는 2023년에 달리기를 시작했다.

고등학교 체육시간이 끝난 이후로 나는 자발적인 달리기를 해본 적이 없었다. 깜빡이는 신호등의 파란 불에 쫓겨 조금 발걸음을 빠르게 하기만 해도 얼굴이 빨개져서 헉헉거리는 대단한 운동치였다. 그런데 나와 비슷한 처지인 것처럼 보이던 이웃 언니가 어느 날 살을 예쁘게 빼고 건강한 모습으로 나타나서 달리기를 해보라고 권했다.

달리기 같은 건 하지 못한다고 손사래를 치자 직접 휴대폰에 앱을 깔아주기까지 했다. 자기 같은 사람도 할 수 있을 만큼 정말 쉬우며, 두 달이 흐르면 쉬지 않고 30분을 달릴 수 있는 사람이 될 수 있다고 했다.쉬지 않고 30분을 달릴 수 있는 사람. 세상에 태어나서 그렇게 멋지게 들린 말은 다시 없는 것 같았다.

그런 사람은 나와는 다른 세계에 살고 있는 사람일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겨우 휴대폰 무료 앱과 2개월의 시간이면 그런 유니콘 같은 존재가 될 수 있다니? 그것은 더없이 매혹적인 유혹이었고 오랫동안 잠들어있던 나의 욕망을 자극했다. 폭염이 어느 정도 지나서 해진 뒤에는 숨 쉴 만하다 싶던 늦여름 저녁에 나는 처음으로 휴대폰 앱이 시키는 대로 달리기의 첫발을 내디뎌보았다.

나와 같은 서툰 초심자에게 최적화된 달리기 앱은 한 가지 중요한 팁을 알려주었는데, 숨이 차지 않도록 천천히 달리라는 거였다. 옆사람과 이야기를 할 수 있을 정도의 속도를 유지하라고 했다. 시키는 대로 했더니 거의 달리기라고 할 수 없는 속도가 되었다. 발걸음이 빠른 사람이라면 나를 휙휙 지나쳐갈 수 있을 만큼 나는 느릿느릿 천천히 달렸다. 어쨌거나 걷기가 아니라 분명히 달리기였고, 앱이 시키는 대로 중간중간 쉬어가며 달리니 그다지 힘들지 않다는 기분으로 해볼만했다.

처음에는 1분 달리고 2분 걷는 식으로, 달리는 시간보다 걷는 시간이 길었다. 회차를 거듭할수록 달리는 시간이 조금씩 길어졌지만 어쨌거나 할 수 있었다. 달리는 동안 내 귓가에는 작은 속삭임이 들렸다. 내가 달리다니! 내가 달리다니! 달리는 사람들에 대해 가졌던 비대한 선망과 존경심만큼 나는 달리는 나 자신에 대해 드높은 찬탄과 고양감을 느꼈다.

날씨가 꽤 쌀쌀해진 11월의 어느 날, 나는 마침내 24회의 달리기 프로그램을 마치고 꿈속에나 나올 것 같았던 '30분간 쉬지 않고 달릴 수 있는 사람'이 되었다. 30분을 넘게 달려 5킬로미터를 돌파하던 순간에 나는 인생 최대라 할 만큼 거대한 환희를 느꼈다. 그런데, 달리기를 했는데도 내 인생이 생각보다 크게 변하지는 않았다. 30분을 돌파하는 순간 이마에 뿔이 튀어나와 유니콘이 되는 게 아니었다. 실은, 너무 아무런 차이가 없어서 솔직히 실망스러웠다.

흔히들 말하는 달리기의 좋은 점, 살이 빠지고 활력이 솟고 긍정적이고 강인한 정신력이 생긴다는 식의 변화가 나에게는 일어나지 않았다. 내 귓가에는 다른 속삭임이 들리기 시작했다. 힘들어, 다리 아파, 이런다고 살이 빠지지도 않아, 아직도 한참 남았네. 달리기는 청소나 글쓰기처럼 그냥 힘들고 시간이 걸리는 많은 일들 중의 하나가 되어갔다. 그걸 깨달은 것이 아마 2023년 달리기의 가르침이었을 것이다.

영원히 매 순간순간 행복하고 보람찬 일은 없다. 들인 노력에 비해서는 터무니없이 작게 느껴질 지라도 그저 꾸준히 하다 보면 그래도 내가 무언가 나아지고 성장했다는 느낌을 받게 되는 어떤 일들이 있고 나는 그 일들을 묵묵히 해나가야 할 뿐이다. 그리고 확실히, 청소나 달리기나 글쓰기의 공통점이 있다면, 끝낼 때 잠시, 무척 행복하다.

건널목 하나를 건너고도 헐떡거리던 지난 여름의 나와 30분을 달릴 수 있게 된 나 사이에 그리 큰 차이가 있지는 않았다. 하지만 생각해보면, 그건 커다란 차이이기도 하다. 나는 이전까지 아니었던 어떤 사람이 되었다. 그것만으로도 분명 의미 있는 2023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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