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남지방은 조령 즉 문경 새재의 남쪽을 말하고 호남지방은 호강의 남쪽 즉 지금의 금강의 남쪽을 뜻한다. 예전에는 금강을 호강(湖江)이라고 불렀기 때문이다. 두 지방 사람들의 풍수상 기질을 비교해 보고자 한다. 이것은 반드시 그렇다기보다 필자가 보는 하나의 관점이다.
의병도 항상 시동과 발동은 경상도에서 먼저 났으나 본격적으로 저항을 지속하여 마무리를 지었던 곳은 호남이었다. 이것은 지세와 기질상에서 비롯된다고 본다. 조선시대 의병사를 살펴봐도 성질이 급한 영남유림들이 분기탱천(憤氣撐天)하여 먼저 일어서면 호남 유림에서 세를 관망하다가 들고일어나 끝마무리를 짓곤하였다. 이러한 사실은 부마항쟁과 광주민주화운동을 봐도 그렇다. 지조와 기개는 영남인이, 은근과 끈기는 호남인들이 더 지긋하다.
◆지조와 기개의 영남 선비정신, 은근과 끈기의 호남 선비정신
이러한 특징은 어디서 연유하는가? 음택의 경우 사방 주위의 지형적 형태에 의해 여러 종류의 정기가 형성되는 바 이에의해 그 후손들의 활동과 발전과정이 각각 다르게 나타난다고 본다. 양택에 있어서도 그 지형의 특성에 의해 정기의 형태가 달라지기 때문에 그 지형에서 생활하는 사람들도 그 개성과 특성의 차이가 있게 된다고 보는 것이 풍수지리사상이다.
풍수사들은 호남과 영남의 지형적 특성에 관해 프랑스와 독일의 지형적 특성에 견주어 설명하고 있다. 우선 호남과 프랑스의 지형을 보면 동고서저하고 평야지대가 많을 뿐만 아니라 발원지를 달리하는 강물이 한 곳으로 모이지 않고 각각 다르게 흘러간다. 지관들은 이를 "산발사하(散髮四下)라고 했다. 호남은 영남의 서쪽에 위치하고 있는 것처럼 프랑스 역시 독일의 서쪽에 위치하고 있다.
이 두 곳은 강과 평야가 많아서 농산물이 풍부하다. 주민성과 문화면을 보면 역시 호남과 프랑스의 공통점이 많다. 예술적 감각이 뛰어나며 낙천적이고 자유분방하다. 프랑스에 대혁명 등 민중의 투쟁심이 강했고, 호남도 동학혁명 등 민중의 투쟁정신이 강하게 나타났다. 음식문화가 발달한 점도 유사하지만 특히 예술인, 체육인, 미식가(美食家)들이 많은 것도 동일하다.
영남과 독일의 유사한 점을 보면, 그 지형이 동고서저로 평야보다는 산악지대가 많고, 또한 영남은 낙동강을 중심으로 샛강의 물이 모여들고 독일은 라인강을 중심으로 물이 모여든다. 모여든 물은 농업용수와 공업용수가 된다. 영남은 호남의 동쪽에 있고 독일은 프랑스의 동쪽에 위치하고 있다. 영남이나 독일은 다 같이 공업이 앞섰고, 영남에 동양 최대의 조선소가 있듯이 독일에 유럽 최대의 조선소가 있어 유보트 등 조선산업이 발달했다.
◆ 영남과 독일, 호남과 프랑스 기질 유사
영남과 독일의 주민 기질과 문화의 유사점을 본다면, 영남은 논리적이고 철학적인데, 독일도 합리적이고 철학적이다. 말씨에 있어서도 영남은 산세가 깊어 자연에 순응하는 반면 투박하고, 독일어는 딱딱하고 강한 억양이 유사하고, 영남인은 협동심과 응집력이 강한데, 독일인도 역시 검소하고 생활력이 강하며, 영남은 과학과 경제학이 발달하였고, 독일은 과학 철학 경제학이 발달한 점에서 유사하다.
호남의 지세는 예로부터 터가 넓고 산세가 크게 험한 땅이 없어 물산이 풍부했으며 리아스식 남서 해안은 갯벌로 인해 해산물이 풍부하여 먹는 것에 대한 걱정은 타지방보다 덜하였다, 인심은 야박하지 않으나 소신이 강하여 잘 타협할 줄 모르고 타지인(他地人)에 대한 배타성은 완고한 면이 있다.
그것은 유배되어 왔던 선조들의 타인에 대한 경계심에서 일부 기인한 것으로 추측된다. 산세가 높지 않고 야트막하니 자연을 볼 때 경배보다는 개척과 정복의 대상으로 보며 관계 진출이 어려워 법조계로 많이 나갔다. 예로부터 호남지방에는 천석군, 만석군이 많았는데 농토를 많이 가진 자는 지주로서, 그 밑에 논배미를 얻어 농사를 짓는 사람은 소작인으로 생계를 유지한 형태로 문화가 양분되어 발전하게 되었다.
부호들은 지주(地主)문화로, 소작인들은 소작(小作)문화를 정착시키는데 양반 지주들은 판소리와 서예문화로 기질을 발산하였고 소작인들은 물산을 바탕으로 음식(飮食) 및 기호(嗜好)문화가 발달하였다. 호남의 지주들이 조선 말과 일제시대 가산을 정리하여 학교를 많이 세운 것도 이와 관련 있다고 본다.
호남인들의 선조(先祖)는 조정에서 당파싸움이나 사화(士禍)에 연루되어 유배를 온 사람들이 많아 당시 한양의 선비문화가 유입되었고, 현지처를 두어 생활을 영위하면서 권토중래(捲土重來)와 재기를 도모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따라서 현실정치에 대한 불만이 많을 수밖에 없었고 현세보다 새로운 세상을 기다리는 미륵신앙이 활발하게 성장하였다. 삼국시대부터 정치적 이유에서 신라는 화엄사상을 숭상하고 백제는 미륵사상을 신봉한 점도 있다.
이것이 조선시대 정여립사건이나 모반사건에 호남인이 많이 연루되는 사상적 토대가 되었을 것으로 본다. 미륵불은 현세보다는 미래세를 다스리는 부처인데 미륵사상이 호남지방에 뿌리가 깊다. 과거 선비들의 저항 기질과 사상은 전국 NGO 단체 대부분의 본부가 광주에 적(籍)을 두고 있으며, 인구 330만인 부산에 신문사가 겨우 2개인데 비해, 인구 142만 명인 광주에 지방 신문사가 십 여 개가 있는 것을 볼 때 산발사하의 지세와 저항정신이 전혀 관련이 없다고 볼 수 없다. 지세가 영향을 미쳐 자기주장과 의견이 강하며 무의식 속에 격세유전(隔世遺傳)되기 때문이 아닌가?.
◆영남인은 화엄사상, 호남인은 미륵사상 신봉
전남북지역에 매향이란 지명이 많고 미륵신앙을 숭상하는 미륵불 조각상이 반쯤 땅속에 묻혀 있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이것은 미륵불이 땅에 묻혀 있기보다 땅속에서 솟아남을 상징한다.
민중들은 미륵불이 출현하기를 발원하여 계곡물과 바닷물이 만나는 갯벌에 향나무와 참나무를 묻었는데 세월이 흐른 뒤에 침향이 되면 미륵세계가 전개될 것이라는 염원을 품었다. 이것은 관리들의 수탈과 횡포에 불만을 품고 저항한 민중의 표식이었다. 호남인들은 현실보다 내세(來世)나 이상적인 유토피아(utopia)를 꿈꾸고 있었다.
지금도 호남지방에서는 여자들이 농사일을 도맡아 하고 남자들은 유유자적하는 풍습이 잔존해 있음을 본다. 이런 현상은 권문세가의 현지처들이 실질적인 살림을 담당하다보니 세월이 흐르면서 하나의 전통으로 굳어진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지금은 동서로 왕래가 잦아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니지만 영남 남성과 호남 여성이 만나 결혼한 가정과 영남 여성과 호남 남성이 결혼한 가정을 비교해 보면 전자가 다복한 가정을 가꿀 확률이 기질상 높다고 하는데 통계학적으로 분석해 볼 가치가 있다.
주 은 식 한국전략문제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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