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서울의 봄'이 전두환을 '전두광'이라 한 것은 그를 반란자로 보았기 때문일 것이다. 1979년 12월 12일 그가 최규하 대통령 대행은 물론 노재현 국방부 장관의 결재를 받지 않고 정승화를 연행하려고 한 것만 본다면 반란으로 볼 수 있겠다. 그러나 10·26부터 살펴보면 다른 사실이 발견된다.
사망한 박정희를 국군서울지구병원으로 모신 김계원이 청와대로 불러낸 최규하 총리에게 김재규가 범인임을 알린 것은 그날 저녁 8시 40분쯤이었다. 그 무렵 살기등등한 모습으로 정승화 육군 참모총장과 육본 벙커로 가 있던 김재규가 국무위원을 호출했기에, 그와 최 총리는 육본으로 갔다. 그리고 열린 회의에서 김재규는 '대통령이 유고'라며 비상계엄 선포를 주장했으나, 동조하는 이가 없었다.
11시 40분 김재규 지지 세력이 없다고 본 김계원이 노 장관과 정 총장을 불러내 김재규가 현장에 떨어뜨린 권총을 보이며 그가 범인임을 알렸다. 그 즉시 노 장관은 정 총장에게 헌병대와 보안사를 동원해 김재규 체포를 지시했다. 회의장에 온 김진기 헌병감이 불러낸 김재규를 보안사 요원들이 체포한 것은 27일 0시 30분이었다. 그리고 새벽 3시 최 총리가 주재한 국무회의가 끝나고 4시 10분 정 총장을 계엄사령관으로 한 부분 비상계엄이 선포됐다. 부분 비상계엄에서는 계엄사령관이 전권을 갖는다.
그때까지 김계원을 포함한 요인들은 정승화가 김재규의 요청으로 현장에서 50여m 떨어진 중정부장 안가로 가서 식사를 했고, 총성(銃聲)이 있은 후 김재규가 핏자국이 있는 흐트러진 옷매무새로 달려와 횡설수설하다 정승화의 의견으로 같이 육본에 왔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이 사실은 보안사 요원들이 서빙고 분실로 데려간 김재규를 신문하면서 비로소 밝혀졌다.
이 때문에 정승화에 대한 조사 필요성이 제기됐으나, 부분 비상계엄으로 그가 전권을 쥐고 있어 신중을 기해야 했다. 군부는 정승화를 조사해야 한다는 세력과 정승화 계열로 빠르게 나뉘어 갔다. 합수부는 정승화 계열을 자극하지 않기 위해 11월 6일의 '10·26사건 수사 발표'에서는 '김재규의 우발적 범행'이란 설명을 했다. 그리고 12월 3일, 김재규가 범인이란 것을 듣고도 함구했던 최규하 대행을 '조용히' 조사했다.
12월 12일엔 전두환이 최 대행에게만 정승화 연행에 대한 보고를 해 결재를 받으면 수사대는 그 결재가 나올 것으로 추정되는 시각, 정 사령관을 연행한다는 비밀 계획을 짜 실행에 들어갔다. 그런데 최 대행이 노 국방의 결재를 먼저 받아오라며 거부했다. 총리실을 나온 전두환이 노 장관을 찾아 처음으로 정승화 연행을 보고하니, 그는 서명을 하고 같이 총리실로 들어가 최 대행의 서명을 받아줬다.
그러나 그때는 육군 총장 공관에서 총격전이 벌어지고 정승화의 전화를 받은 장태완 수경사령관이 합수부를 지지하는 세력과 대립하는 사태가 터진 다음이었다. 다수의 지휘관이 합수부를 지지했기에 충정 작전에 참여하는 부대들이 서울로 들어오면서, 이 대결은 합수부 측의 승리로 끝이 났다. 이 과정에서 특전사령관 비서실장인 김오랑 소령이 총격을 받아 사망했다.
정승화는 김재규와 대통령 시해나 혁명을 모의한 적이 없다. 그날 그가 김재규의 전화를 받고 궁정동에 간 것은 불운이었다. 그러나 총성을 들었음에도 피가 튄 옷매무새로 달려온 김재규의 횡설수설을 들어주다 육본으로 가자고 한 것은 그의 미스로 보인다. 합수부는 현장 목격자임에도 김재규가 범인이라는 것을 속히 밝히지 않은 김계원은 물론 김계원으로부터 보고받고도 함구한 최규하도 조사했으니 정승화를 조사하지 않을 순 없었다.
그래서 최 대행에게만 알리는 비밀 계획을 만들어 실행에 들어갔는데, 최 대행의 거부로 틀어지면서 대결이 일어난 것이 12·12다. 최규하로서는 12월 3일의 조사가 불쾌했을 수 있다. 그리고 이듬해 5·18이 일어나 많은 희생자가 발생하자 최규하 대통령과 신군부 세력은 감당하기 어렵다고 본 듯 권력을 놓으려 했다. 그때 '리스크 테이킹'을 한 이가 전두환이었기에 5·18도 전두환 책임으로 덮어씌우려는 현대사가 만들어졌다.
김영삼 정권은 5·18특별법을 만들어 12·12를 반란으로 규정했다. 정치로 역사를 만든 것이다. 소설적 방법으로 허위를 벗겨낼 수 있는 게 영화인데, '서울의 봄'은 12·12를 반란으로 단정하고 스토리를 전개했다. 영화마저 역사를 구축(驅逐)하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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