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서울의 봄'이 1,000만 관객 돌파를 앞두고 있어 화제다. 12·12 사건을 소재로 꾸며낸 허구(fiction) 영화임에도 불구하고 관객들은 이를 진짜 역사로 받아들이는 경향이 농후하다. 이런 사실은 지난 12월 21일 국회 국방위에서 김병주 더불어민주당 의원의 "지금 국민들은 이 영화를 보면서 분노 게이지가 올라가고 심장박동수가 올라가는 등 특히 젊은 세대들이 분노하고 있다"라는 발언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그렇다면 사법기관이 군사 반란으로 낙인찍은 12·12의 역사적 사실은 무엇인가? 필자는 김영삼 정부 시절 진행된 12·12와 5·18 사건 검찰수사기록 14만 페이지를 정독했다. 그 결과 우리가 상식으로 알고 있는 12·12는 역사적 사실과 크게 다르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1980년 당시 사법부는 정승화에게 내란방조죄로 징역 10년을 선고했다. 판결 이유는 "김재규가 범인인 줄 알면서도 김재규의 범죄를 은닉하고, 김재규의 뜻에 따라 국방장관의 소관 사항인 병력동원을 월권적으로 주도하여 김재규의 내란을 방조"했기 때문이다.
정승화 총장은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 대통령이 시해된 궁정동 안가, 시해 현장에서 50m 옆에 김재규의 부름을 받고 대기하고 있었다. 그는 대통령 시해 직후 피가 튄 와이셔츠 차림에 화약 냄새 진동하는 권총을 허리에 꽂은 김재규와 같은 차를 타고 육군본부로 이동하는 차 안에서 박 대통령 피격 사망 사실을 알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직속상관인 국방장관에게 허위 보고했고, 필요한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
정 총장은 육본에 도착하자마자 이재전 경호실 차장에게 경호실 병력 출동 금지 명령을 내렸고, 경호실장이 작전 지휘권을 갖고 있는 수도경비사령부 병력을 출동시켜 청와대를 포위했다. 이것은 명백한 월권행위다.
▶정승화의 3김 비토 발언
정 총장은 11월 16일 군 수뇌부 인사를 단행, 육본 작전참모부장에 자신의 직계인 하소곤, 수도경비사령관에 자신의 심복인 장태완을 임명했다. 수도권을 방어하는 3군사령관에 이건영, 특전사령관에 정병주를 임명했는데, 이들은 김재규의 핵심 인맥으로 소문이 자자했던 사람들이다. 정병주는 김재규의 안동농림고 후배였다.
11월 26 정승화는 언론사 사장단·편집국장과의 오찬에서 "김대중은 사상적으로 불투명하고, 김영삼은 무능, 김종필은 부패한 사람이므로 새 시대 정치 지도자가 될 수 없다. 만약 이런 사람들이 대통령이 된다면 군은 쿠데타 일으켜서라도 막을 것"이라고 발언하여 충격을 주었다.
합수부는 정승화 총장의 3김 비토 발언이 김재규가 했던 "3김은 사상이 의심스럽고, 무능하고 부패하여 안 되고 대통령 시해 후 혼란 정국을 수습하여 나라를 이끌어갈 적임자는 나뿐이라고 생각했다"라는 진술 내용과 일치하는 사실을 확인하고 큰 충격에 빠졌다.
전두환 합수본부장은 세 차례나 노재현 국방장관에게 정승화 연행 조사를 건의했으나 노재현은 이를 거부했다. 직속상관인 국방장관이 반대하자 전두환은 대통령에게 직접 보고할 수밖에 없다고 판단했다.
당시 전두환·정승화의 관계는 육군 소장 대 대장의 상하 관계가 아니라 수사관과 피의자 관계였다. 국가로부터 박 대통령 시해 수사 전권을 위임받은 기관이 합수부다. 수사에 필요할 경우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누구를 소환·연행·조사할 것인지는 합수본부장 권한이었다.
정승화 연행 조사는 대통령 재가가 필요치 않은 사안이었다. 하지만 그의 연행은 계엄 정국에 작지 않은 충격 가할 우려가 있어 보고한 것이다. 12월 12일 오후 6시 30분 보고를 받은 최 대통령은 정승화 연행을 반대한 것이 아니라, 관계 국무위원인 국방부 장관을 통해 보고 받겠다면서 노재현 장관을 호출했다. 노재현은 대통령 호출에도 불구하고 저녁 7시 10분부터 10시간 동안 잠적했다.
바로 그 시각, 합수부의 우경윤·허삼수 대령이 한남동 총장 공관에서 정승화 총장에게 동행을 요구했다. 피의자 정승화는 연행을 거부하고 "이놈들 잡아라"라며 수사관 체포를 지시했다. 최규하의 관료주의, 노재현의 잠적, 피의자 정승화의 저항이 12·12 참극의 원인 제공자다.
오후 10시 10분, 노재현 장관은 피신해 있던 한미연합사 벙커에서 문홍구 합참본부장과 이건영 3군사령관 등에게 "무슨 일이 있어도 병력 출동 금지"를 명령했다. 장태완 수경사령관은 이 명령을 거부하고 밤 11시 수경사 소속 전차 20대, 장갑차 30대를 퇴계로 아스토리아 호텔 앞에 전개하고 전 장병에게 실탄을 지급했다.
▶장태완, 국방장관 명령 어기고 병력 출동
또 장태완의 요구를 받은 정병주 특전사령관은 9공수여단을 서울로 출동시켰다. 이날 밤 노재현 장관의 명령을 거역하고 병력을 먼저 동원한 것은 신군부가 아니라 정승화 측이었다.
대전복 업무 책임자는 보안사령관이다. 전두환은 국방장관의 병력 출동 금지 명령을 어긴 정승화 계열 장군들의 병력동원은 국가 변란 행위라고 판단, 김용휴 차관에게 "대전복 정부군 출동이 불가피하다"라고 보고했다.
12월 13일 자정 무렵 전두환 보안사령관은 대전복 대응을 위한 정부군 출동을 공식 요청하고, 관련 사실을 대통령에게 보고했다. 그 결과 1·3·5공수여단과 2기갑여단, 9사단 1개 연대가 서울로 출동했다. 이어 불법적으로 병력을 출동시킨 장태완·정병주 사령관을 체포하면서 새벽 3시 30분, 보안사의 대전복 작전 임무가 종료되었다.
정승화 측은 이날 밤 지휘관 명령에 불복한 장교들이 하나회 소속이었다면서 12·12를 하극상에 의한 조직적인 군사 반란 행위라고 주장했다. 그런데 수경사의 처장·여단장급 지휘관 37명 중 하나회 소속은 3명(박희도·장세동·김진영)뿐이었다. 장태완을 체포한 신윤희 중령, 정병주를 체포한 박종규 중령도 하나회가 아니었다.
12·12의 긴박했던 밤에 수경사·특전사 장교들은 직속상관으로부터 "정승화를 납치한 합수부 측 반란군을 공격해 총장을 구출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동시에 30경비단 측 장성들로부터 "정승화 연행은 박 대통령 시해 사건 수사를 위한 정당한 연행이니 병력 출동 불가" 요청을 받았다. 젊은 지휘관들은 정승화 연행을 정당하고 적법한 행위로 판단, 직속상관의 명령에 불복함으로써 국군 간 대규모 유혈 충돌을 막았다. 수경사 장교 450명 중 장태완의 명령을 따른 장교는 60명에 불과했다. 이것이 12·12의 역사적 사실(historical fact)이다. (김용삼 펜앤드마이크 대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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