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써 12월 하순이다. 계묘년 한 해도 또 이렇게 저물어 간다. 희망 가득 품고 한 해를 달려왔지만 지금 가슴 한편에는 성취에 대한 뿌듯함보다는 아쉬움이 더 큰 자리를 잡고 있다. 왜 이맘때는 이루지 못한 것에 대한 미련이 더 크게 자리 잡는 것일까?
돌이켜보면 금년 한 해를 정동진 해맞이 행사와 함께 시작했다. 한양 경복궁에서 정(正)동쪽에 자리 잡은 바닷가인 정동진은 대표적 해돋이 명소다. 2017년 동해안 도보 여행을 할 때 걸었던 정동진에서 심곡까지 부채처럼 펼쳐진 해안단구 지구인 '바다부채길'은 해파랑길 800㎞의 백미 구간이고, 썬크루즈 호텔에서 보는 새해 일출은 보는 이의 숨을 멎게 하는 멋진 곳이다.
하지만 내년에는 정동진에서 일출 대신 일몰을 만나고 싶다. 한 해가 시작되는 시점에서 일출을 보고 찬란한 꿈을 꾸기보다는 2024년 마지막을 상상해 보는 것이 한 해를 알차게 보내는 데 도움이 될 것 같기 때문이다. 마치 이집트 파라오가 왕이 되어 제일 먼저 자기 무덤인 피라미드를 짓기 시작했던 것처럼. 마치 우리 선조들이 '자찬묘지명'이란 이름으로 자신의 생을 미리 정리해 본 것처럼.
한때 좌우명으로 '초심을 잃지 말자'라는 말을 가슴에 새기고 살아온 적이 있다. 하지만 보통 사람이 초심을 끝까지 지켜나가기는 참으로 어렵다. 그것은 순수함과 지키지 못함이라는 두 가지 속성 때문에 그만큼 소중한 존재다. 마치 이루어질 수 없는 첫사랑처럼.
핵 주먹 소유자 마이크 타이슨도 이렇게 말했다. "누구나 그럴싸한 계획 하나씩은 가지고 있다. 처맞기 전까지는." 복싱 선수가 시합을 앞두고 엄청난 연습과 작전 계획을 가져도 링에 오르면 흠뻑 두들겨 맞는 법이다. 세상 이치가 이럴진대 새해를 맞이한 범인들이 그럴싸한 포부 하나씩 가지고 거창하게 출발한다고 해서 결말이 기대에 미칠 리가 없다. 작심삼일로 끝나 연말에는 모두 이룬 것 하나 없다는 가슴앓이를 한다. 어찌 보면 새해에 더 행복해지겠다는 계획 같은 건 없는 것이 더 좋을지 모르겠다.
다가오는 새해는 푸른 용의 해, 갑진년이다. 청룡은 상서로움을 상징한다. 그러나 새해 우리 살림살이가 크게 펴질지는 장담하기 어렵다. 고물가, 고금리 속에서 서민과 중소기업의 어려움은 지속될 것이고, 수출에 크게 의존하는 우리의 최대 교역국인 중국 상황이 좋지 못한 점도 경제회복의 부담으로 작용할 전망이다. 이런 상황에서 4월 총선이 다가온다. 상황을 냉정하게 직시하고 대응해 나가기보다는 화려한 말의 성찬이 앞설까 걱정이다.
담대한 꿈을 갖고 이를 실현하려고 최선을 다하는 자세는 아름답다. 하지만 불확실성이 지배하고 촌각을 다투며 살아가야 하는 현재의 '분초사회'에서 모든 것을 계획대로 밀고 나가는 것은 정말 어렵다. 연말인데도 매출 500대 기업의 절반 이상이 아직 내년도 투자계획도 수립하지 못했다 한다. 계획적으로 행동하는 대기업도 이럴진대 순간순간 변덕에 휘둘리는 개인의 장기 계획과 이행력은 얼마나 믿을 수 있을까.
삶의 올바른 자세는 마지막을 상상하며 현재의 순간을 충실하게 살아가는 것이 아닐까 싶다. 일출이 있으면 일몰이 있고, 시작이 있으면 끝이 있다. 화무십일홍이요, 권불십년이다. 선거 때 큰 약속을 하고 공약(空約)으로 끝내는 '태산명동서일필'식 행동보다는 임기 말에 작은 것 하나라도 제대로 지킨 모습을 유권자들은 보고 싶은 법이다. 끝을 그려 보며 생활하는 자세가 더욱 필요해 보인다.
시간에는 세 가지 걸음이 있다고 한다. 미래는 주저하면서 다가오고, 현재는 화살처럼 달아나며, 과거는 영원히 정지해 있다. 과거의 추억은 적당한 색깔이 덧씌워져 아름답게 채색되어 기억된다. 미래는 주저주저 다가오지만 현재란 놈이 쏜살처럼 달아난다. 어제 시작한 것 같았던 2023년 계묘년도 마지막 순간에 다가가고 있다.
올해의 잘못을 내년에는 반복하지 말아야겠다. 내년이 시작되는 순간에 내년의 끝을 상상해 보자. 이런 자세로 살아간다면 우리 살림살이도 조금씩 나아지고, 경제적 상황도 꽃샘추위를 넘기고 따뜻한 봄날을 맞을 수 있을 것이다. 올해에는 정동진에 가서 아름다운 일몰을 그려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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