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9년 12, 12 신군부 군사 반란을 다룬 영화 <서울의 봄>이 33일 만에 천만 관객을 모았다. 하나회를 중심으로 한 신군부의 정치역사를 다룬 TV드라마와 라디오, 영화, 다큐멘터리 등이 전파를 탄 적은 있었지만, 이처럼 한국 정치사의 5공화국 수립 과정에 관심이 뜨거웠던 적은 없었다. 극 중 인물 이태신(정우성 분)은 실존 인물 장태완 수도경비 사령관을 연기한 것으로 신군부의 군사 반란을 막기 위해 전두광과의 그날, 9시간의 대립 구도를 보여주고, 특히 마지막 장면은 국가를 위한 정의(正義)가 무엇인지를 생각게 하는 가슴에 박히는 장면이었다. 다음 해 '서울의 봄'은 신군부의 계절로 바뀌었고, 80년 5·18일 광주사태를 지나 1년이 지난 뒤, '국풍 81'을 서울 여의도 광장에서 대규모 축제로 개최한다. '국풍 81'은 전국 194개, 244개 대학팀, 88개의 일반팀이 659회의 공연을 하면서 1,000만 명이 참여하는 초대형 국가 주도 문화축제로 기획되었다. '국풍 81'은 '국가보위비상대책위'가 대규모 시위로 뜨거워진 거리와 광주민주화운동, 아스팔트 위 '서울의 봄' 열망하는 함성을 잠재우고 군부 정권을 합법적인 전통성으로 치장하기 위해 문화축제를 동원한 국민 유화정책이었다. 정치적 메커니즘으로 작동하며 정치 사회적 이데올로기를 생산하는 문화축제는 군부독재의 이념을 확산하고 국민을 통제해 정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한 프로파간다 역할을 수행하면서도, 그 안에 함의되어 있는 이미지, 상징, 기호, 텍스트에서 생산되는 사회적 의미체계는 역으로 정치환경에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다.
신군부의 5공화국뿐만 아니라 한국 사회는 역대 정권을 거치면서 공연윤리위원회가 해체된 1998년까지 검열과 통제가 이루어졌고, 이후 블랙리스트 사태까지 공연예술계는 표현의 자유를 무력화하는 검열 정치로 몸살을 앓아야 했다. 검열과 통제, 문화예술을 활용하는 프로파간다 등, 문화예술을 통해 정치 권력을 확장하거나 문화예술의 특성을 국민적 지배 수단으로 활용하는 정치권력과 문화예술의 함수관계는 '서울의 봄'을 거쳐 역동적인 민주주의 국가를 만들어온 한국 사회만큼 변화되었을까. 그동안 < 외로운 개, 힘든 사람, 슬픈 고양이>, <너의 왼손이 나의 왼손과 그의 왼손을 잡을 때>, ,<액트리스 원: 국민로봇배우 1호>, <극동 시베리아 순례길>을 선보이며 동아연극상 희곡상과 백상예술대상 젊은 연극인상을 수상한 정진세 작, 연출의 <신파의 세기>(제작, 2023 대학로극장 쿼드, 드라마터그 양근애)를 통해 그에 대한 방향을 찾을 수 있을 것 같다. 이번 공연에서 정진세는 무대에 가상국가인 중앙아시아 신생 자립국 '치르치르스탄'을 세우고 우회적인 풍자와 조롱으로 신파성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한국연극의 현실을 비트는 한편, 문화예술로 왕정국가를 유지하고 국민 유화정책을 시도하는 '치르치르스탄'을 통해 70-80년대 한국 군부정권의 문화정책, 나아가 문화융성을 4대 국정 기조로 삼은 박근혜 정부를 소환한다.
◆ 가상국가와 문화의 정치
정진세 연출이 대학로 쿼드 극장에 세운 가상국가 치르치르스탄은 백색의 광활한 사막의 분위기로 표현된다. 무대 후면 스크린에 영상을 투사해 배경과 장면 전환에 활용한다. 장면 전환으로 활용되는 영상은 80년대 중동 현장에서 날아온 입체 그림 카드를 연상하게 한다. 치르치르스탄의 지도부터 펴보자. 중앙아시아 부족 연합으로, 19세기 말 영국과의 그레이트 게임에서 승리한 러시아제국으로 영토가 편입된 상태다. 소련 붕괴 이후에도 치르치르스탄 국민은 30년 동안 유대 민족처럼 중앙아시아 전역에 흩어져 살았고, 2019년 자립국으로 인정받아 영토를 되찾고 현재는 리튬 광물자원이 발견된 신생 자립국이라는 설정이다. 유일한 국가 자원이라 할 수 있는 2차 전지 핵심 원료인 리튬 매장량이 세계 3위인 신생 자립국으로 '국가가 정하면 국민은 따르는' 왕정국가다. 세 명의 왕녀(클리쎄, 클레르, 퀴어리)는 각자 선호하는 문화를 치르치르스탄 국민들에게 보급하기 위해 계획을 세운다. 국가서열 2위인 왕녀 클리쎄(전선우 분)는 K-신파를, 클레르는 K-POP을, 퀴어리는 브라질 삼바를 지지하는데, 각국 정부에 요청해 3조 규모 입찰 경쟁을 붙이는 대규모 국가문화 보급 프로젝트를 시행한다. 국립 현대극장 공연팀장인 미스터 케이, 김민식( 김준우 분)이 한국 정부(기재부 주무관)의 요청으로 신파극의 K-신파 콘텐츠를 들고 치르치르스탄 입찰 경쟁에 뛰어들면서 극은 시작된다. <사랑에 속고 돈에 울고>, <장군과 함께>, <순자, 동순, 점순>, <저 하늘 너머 슬픔이>, <태영과 보라> 등 역대 신파성 짙은 작품들을 패러디하는 식이다.
가상국가 치르치르스탄은 몇 가지 지점에서 한국 사회와 닿아 있다. 우선 극 중 치르치르스탄은 소련의 붕괴까지 70년 동안 국가영토가 없는 유목 생활을 해야만 했고 소련의 붕괴 이후에도 30년 동안 자립국으로 인정받지 못한 신생국가로 설정되어 있다. 이러한 설정은 한국의 일제강점기 35년의 식민지 역사를 떠올리게 한다. 또 극 중 신생 자립국인 치르치르스탄은 과거 박정희 정권의 잘살아 보세, '새마을 운동'을 환기하게 하는 국민문화보급 운동을 국가 차원에서 계획한다. 여기에 극 중 왕녀 클리쎄는 문화예술을 권력 유지의 이데올로기로 활용하려 하는데, 이는 한국예술문화윤리위원회(이후 공연윤리위원회, 1966~1998)의 검열과 통제의 역사를 떠올리게 하며, 치르치르스탄을 한국사회의 과거이면서도 현재로 수용하게 한다. 또 치르치르스탄은 왕정국가로 설정되어 있지만, 실제 무대에는 절대 권력자인 왕이 부재(不在)한다. 왕위 계승을 할 수 있는 왕녀 셋만이 극 중 인물로 설정되어 있다. 그 중 한국에서 유학 생활을 하며 K-신파에 매료된 첫째 클리쎄 공주가 주요 극 중 인물로 설정되어 있다.
극을 따라가다 보면, 70년대 군부 독재 시대를 돌아 현재까지도 대물림되는 정치 권력이 연상되기도 하는데, 문화융성을 4대 국정 기조로 삼은 박근혜 정부를 떠올리게 된다. 한국문화의 세계화 전략으로 '미르재단'과 'K-스포츠재단'을 설립했지만, 국정농단과 블랙리스트 사태로 얼룩진 과거 한국정부의 문화정책, 신파성을 벗어나지 못하고 정체(停滯)되어 있는 한국문화에 대한 은근한 조롱이 느껴진다. 정진세는 30년대 고등 신파의 시대부터 60, 70년대를 돌아 박근혜 정부와 현재 정권으로 이어지는 문화예술(연극)이 변화되지 않은 채 K-신파의 문화로 유지되고 있는 상황을 가상국가 치르치르스탄의 문화정책과 정치에 빗대어 보여준다. 정진세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동시대 한국연극은 여전히 신파에 머물러 있고, CJ토월극장, SM남산예술극장, YG 동승극장, 네이버 연우무대, 카카오 삼일로 창고극장처럼 국공립극장은 상업 자본에 매몰되어가고 있다. 이러한 지점들을 정진세는 웹툰 같은 옴니버스 장면을 통해 조롱하고 풍자한다. 할아버지가 법원에 있는 '빈나'(김빛나 분), 어머니가 치르치르 건설 상무인 '디아스'(베튤 분), 부모님이 왕궁에 생수를 납품하고 있는 '민느'(심효민 분) 등, 극 중 인물들의 금수저 설정은 치르치르스탄의 공정하지 못한 사회구조를 은근히 드러내며, K-신파 국민문화보급 프로젝트 역시 특정 엘리트 집단에게 독점되는 상황을 풍자한다.
◆ <신파의 세기>, 파동의 세기
치르치르스탄이 한국 사회로 치환될 수 있는 가상국가임을 보여주는 또 다른 장면은 핵폐기물 이 버려지는 장면과 리튬 광물자원이 매장되어 있는 것으로 알려진 사막이 그저 소금사막일 뿐이라는 사실이 밝혀지는 장면이다. 변변한 천연자원 하나 없이 특유의 '빨리빨리' 문화로 세계 10위 경제 성장을 이룬 한국 산업화의 역사가 스쳐가며 웃음이 터졌고, 영토 인접 국가들의 핵폐기물 처리장으로 사막이 비밀리에 제공되는 장면에서는 1970년대 박정희 대통령의 자주국방 구상에 따라 극비리에 추진되었던 핵무기개발 프로젝트의 핵연료 재처리 시설 기본 설계서와 설계도면이 공개되었던 뉴스가 떠올랐다. 정진세 연출이 <신파의 세기>를 통해 말하고 싶었던 것은 무엇이었을까. 그가 텍스트와 무대 위에 세운 치르치르스탄의 가상국가는 신생 개발도상국이었던 우리의 60-70년대와 자원도 없는 국가에서 K-문화로 발전하고 있는 지금의 우리, 그 이면의 독재권력과 문화예술정책, 프로파간다의 메커니즘, 문화산업의 신파성에 함몰되어 컨템퍼러리 예술이 될 수 없는 한국연극을 조준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마지막 장면에서 김민식의 딸 민주(김민주 분)는 '엔터 산업의 미래와 한국문화의 성장동력'이라는 고교 수행평가 문제에 대해 이렇게 정리한다. "어떤 예술은 정말 놀랍다. 다른 분야 노동자들 보다 두 배 세 개 일하지만 돈은 벌지 못한다. 저녁도 없고 주말도 없고 휴가도 없다. 공장처럼 매일매일 돌아간다. 그렇게 유지가 된다. 아니 그래서 유지가 된다. R&D를 안 하니까 발전은 못하지만 구성원들의 성실함으로 지속되고 있다. 능력 있는 사람들의 중노동은 얼마나 경이로운가. 엔터 산업은 그런 구성원들이 필요하다. 그들의 피땀 눈물이 산업의 동력이 될 수 있어야 한다. 한국문화의 미래는 그들에게 달려있다!!" 극 중 등장하는 신파극 <사랑에 속고 돈에 울고>에서, "저는 더 이상 사랑에 속지도 돈에 울지도 않을 거예요" 라는 대사에 대한 광호의 대사, "당신답지 않게 참으로 로지컬하군. 그래, 인생은 가까이서 보면 신파고, 떨어져서 보면 컨템포러리니까. 우린 현대를 살아야지" 처럼 연극이 자본과 지원정책, 정치의 관계에서 '로지컬한' 거리를 두고 신파의 드라마 구조를 벗어날 수는 있을까.
정진세의 <신파의 세기>는 제목만큼 '세기(강도)'의 파동은 없었다. 신파 패러디와 에피소드를 웹툰처럼 장면화한 것은 멀리서 보면 컨템포러리적이었지만 가까이서 보면 그 무엇보다도 신파적이었다. 과거 문화예술을 통한 국가의 국민유화정책처럼, 정진세의 <신파의 세기>는 말을통해 관객을 설득하는 정치적 연극이었다. 때로 연극은 은유의 모호함보다는 직접적인 타격을 통해 가슴에 박힐 수 있다. 이 점이 아쉽다.
대경대학교 연극영화과 교수(연극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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