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말과 새해는 '쓰기의 계절'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디지털 스크린에 밀려 갈수록 쓰기가 위축되지만 이맘때면 인쇄업계는 반짝 특수를 누린다. 다이어리를 활용해 으레 새해 계획을 세우기 때문이다. 열심히 쓰다가 '작심삼일'이 되는 경우가 많지만 연말에는 수첩을 주고받는 풍경이 익숙하다. '기록'은 지적 행위라기보다는 '습관'이라고 학자들이 말하는 이유다.
박근혜 전 대통령도 쓰기를 즐겨 손 편지와 메모를 좋아하는 것으로 꽤나 알려져 있다. 육영수 여사가 청와대에 오는 편지를 다 읽어 보고 일일이 답장하는 모습과 박정희 대통령에게서 물려받은 습관이라는 게 정설이다. '수첩 공주'라고 야당에서 폄하하곤 했지만 정작 "그 별명이 싫지 않다"고 했을 정도다.
박정희 대통령도 '메모광'이란 표현에 모자람이 없었다. 새마을운동에 관해 빼곡이 적어 놓은 수첩에는 한 자 한 자 눌러쓴 글자가 오롯이 담겨 있다. 가지런한 글자에서 올곧은 애국심이 엿보인다.
자칫 펜을 잘못 놀렸다가 망신당하거나 제 발등을 찍는 경우도 많다. 한 정치인은 국회에서 '웃기고 있네'라는 메모를 동료에게 건넸다가 카메라에 잡혀 체면을 구겼다. 과거 정부에서 '비선 실세'라 불리던 한 중년의 여인은 직접 작성한 지시 메모가 공개돼 사법적 궁지에 몰리기도 했다. 또래 여성을 살해한 혐의의 젊은 여성도 "안 죽이면 분이 안 풀린다"는 자필 글귀를 들켜, 섬뜩함을 더하게 했다.
지인도 간담이 서늘했던(?) 메모 경험담을 들려줬다. 그는 사장님이 면전에서 수정해 주는 자료의 말을 메모하는 척하고 글자에 낙서만을 줄곧 했더란다. "김 과장, 고친 거 큰 소리로 읽어 봐"란 사장님 지시가 떨어지기 전까지…, 아뿔싸.
메모로 치면 이철우 경북도지사의 일화도 재미있다. 도백도 '메모'를 좋아한다. 박정희 대통령의 새마을 운동 메모를 한동안 집무실에 걸어 놓더니 급기야 팸플릿으로 만들어 귀한 사람들에게 선물한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도지사는 메모에 대해선 '짝사랑'뿐이다. 남의 메모에는 큰 애정을 보이지만 정작 당신은 수첩이 없다.
간부 회의 때나 여러 간담회 등에서 '무(無)수첩'에도 답변이 거침없다. 지난 정부에서는 대통령 공식 행사 때 연설문 없이 연단에서 수십 분이나 경북도의 주요 사업과 각종 통계 등 인사말과 브리핑을 한 것으로 유명하다. 도리어 연설문과 자료를 준비하지 않은 비서실이 당황했을 정도다.
사범대 수학과 출신답게 숫자에 능한 것도 한 이유가 되겠지만 '무수첩' 비결을 물었다. "국민과 도민이 시키는 일인데 쓰든, 안 쓰든 잊어버려서야 되나." 우문현답.
도백은 지금도 수첩이 없다. 수첩이 없으니 메모가 없고, 메모를 하지 않으니 펜이 필요 없다. 지인 중에는 도지사가 기업들과 양해각서(MOU)를 맺을 때 사용했던, 좋아 보이는 볼펜을 득템(?)한 이들이 꽤 있다.
종교 개혁의 선구자 마틴 루터는 1517년 신학교 앞에서 교황청에 도전하는 대자보를 붙인다. 그러면서 말한다. "세상을 바꾸고 싶으면 펜을 들어라. 그리고 쓰라."
쓴들 어떻고, 머릿속에 기록한들 어떠리오.
새해 청룡의 해에는 더욱 도민의 어버이로, 경북 도정을 하나하나 기억하고 곱씹어, 작은 떨림에도 귀 기울이고 잊지 않는 도정을 펼쳐 주시길 바란다.
2024년 1월 3일, 매일신문이 독자 한 분 한 분에게 새해 인사 '메모' 드립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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