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태일·이윤복 거닐던 거리…빌딩 숲 사이 보일 듯 말 듯 전, 여섯식구 단칸 셋방살이…이, 신문·껌 팔아 동생 돌봐 중앙통 벗어나면 한옥 일색…60년 지나 큰 건물로 뒤덮여
누런 봉투에 묵직하게 든 1960년대 필름 뭉치. 반세기를 훌쩍 넘겨서야 먼지를 털고 마주했습니다. 루뻬(확대경)속에 보이는 찰나의 순간들. 알 듯 말 듯 아스라한 필름 속을 헤메다 정신이 번쩍 들었습니다. 하늘을 날며 기록한 지난 날의 대구였습니다.
언제, 왜 찍었을까? 1960년 초 신문부터 몇 년치를 훓었습니다. 계절이 바뀌도록 의문을 풀지 못했습니다. 되돌아 갈 순 없지만 추억이 생생한 사진만으로도 값진 기록. 그때를 찬찬히 들여다봤습니다.
천주교 대구대교구청 너머 멀리 달성공원에 어렴풋이 보이는 건 일제가 남긴 대구신사 건물(현 물개 사육장 부근). 1966년 8월 13일 대구신사 건물이 헐리기 전 이곳엔 한때 단군 성전이 자리하기도 했습니다. 한옥 사이로 우뚝한 서현교회는 1957년 착공 후 수 년째 건축 중으로, 확인 결과 종탑을 올리기 전 1964년 경 모습으로 밝혀졌습니다.
1964년 대구는 중앙통(로) 일대만 벗어나면 사방이 초가와 한옥 일색이었습니다. 앞산 자락엔 다랑논과 과수원이, 수성들엔 드넓은 파밭이 장관이었습니다. 말이 좋아 도시민이지 땅 한 뙈기 없는 사람들은 돈벌이를 찾아 이곳 저곳을 떠돌았습니다. 너나없이 하루하루 먹고 사는 게 제일 큰 걱정거리였습니다.
딱 저 무렵 전태일이 그랬습니다. 1948년 대구에서 태어난 그는 1962년 8월부터 이듬해 12월까지 남산동 단칸 셋방에서 무려 여섯식구와 함께 살았습니다. 효성여고(현 천주교 교육원) 운동장 끝자락에 어렴풋이 보이는 그의 고향집. 예나 지금이나 그대롭니다.
1964년은 또한 이윤복의 시대였습니다. 당시 윤복이는 명덕국민(초등)학교 4학년. 그는 노름에 빠진 아버지와 집 나간 어머니를 대신한 소년가장이었습니다. 신문과 껌을 팔아 동생 셋을 돌봤습니다. 틈틈이 쓴 그의 일기장은 각본이 돼 1965년 개봉된 영화 '저 하늘에도 슬픔이'는 전국을 눈물바다로 만들었습니다.
가난이 원수였습니다. 교육만이 살길이었습니다. 당시 동네마다 제일 큰 건물은 성당과 교회 그리고 학교. 재건운동이 한창이던 이 무렵 이들은 신문물로, 교육으로 근대화를 이끌었습니다. 시골 수재들은 너나 없이 대구로 몰려왔습니다. 대구는 이때부터 교육도시였습니다.
대봉동 경북고(현 청운맨션 자리) 옆 굴뚝이 높은 건물은 1919년 일본인이 세운 편창제사(현 대봉태왕아너스 일대). 누애고치로 명주실을 뽑는 공장으로, 이 때는 한국인이 운영했습니다. 편창제사 부지는 무려 2만5천평(약 8만3천㎡). 편창제사와 함께 조선제사, 대구제사 등 대구에서 생산한 수량은 전국 생산량의 38%. 섬유도시 명성도 이때부터 자자했습니다.
60년 세월도 어제 처럼 휙 지났습니다. 그렇게 컸던 학교, 성당, 교회는 빌딩 숲에 쏙 파묻혔습니다. 이제는 매일매일 다이어트 하는 게 큰 걱정거리가 됐습니다. 전태일, 이윤복이 지금 태어났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빛 바랜 사진속에 멈춘 1964년 대구. 배고팠던 그 시절 아련한 추억이 새록새록 되살아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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