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년 연말이 다가오면 나는 시간을 들여서 꼼꼼하게 '이듬해의 다이어리'를 선정한다. 이는 오래된 나의 행사이다. 사실 나는 다이어리를 대신할 몇몇 개의 이기(利器)를 가지고 있지만 아무리 바꾸려 노력해도 손으로 쓰는 다이어리를 버릴 수가 없다. 올해도 10월쯤부터 올 여름에 새로 산 태블릿을 이용해 내년 다이어리를 대신하려는 시도를 해 보았지만 역시 며칠 지나지 않아 포기해 버렸다.
일정의 수정이나 공유도 편리하고 전자펜을 이용해 얼마든지 '손글씨의 감성'도 느낄 수 있는 최신의 기기였다. 물론 수많은 다른 업무에는 아주 편리하게 애용하고 있다. 나는 지금 이 글도 태블릿을 이용해 쓰고 있다. 말하자면 오직 '일정을 적는 일'만은 볼펜을 들고 쓰는 다이어리를 그 무엇도 대신할 수가 없는 것이다.
아마도 나와 같은 고민을 하고 있는 이들이 꽤 많을 것이라고 예상해 본다. 이맘때 시내 대형 서점 지하 문구점의 다이어리 진열대 앞에는 총총 눈빛을 반짝이는 이들이 남녀노소에 상관없이 장사진을 치고 있으니 말이다. 그들에게도 분명 다이어리를 대신할 스마트폰이나 태블릿 하나 정도는 있을 텐데…. 첨단 디지털 강국이라 자부하는 대한민국에서 이 연래 행사는 왜 이어지고 있을까? 며칠 다이어리와 태블릿을 펼쳐 놓고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지극히 개인적인 취향의 발견이 되겠지만 나의 경우 다이어리에는 있고 태블릿에는 없는 것이 하나 발견되었다. 바로 '삭제나 수정의 흔적'이다. 두 줄을 긋거나 수정테이프로 지워 버린 흔적이 다이어리에는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당연히 삭제 버튼 하나로 말끔하게 기록이 사라져버리는 태블릿에는 그런 잔재가 남을 리 없지 않은가.
그것은 매우 중요한 내 첫 사고(思考) 기록이며 수많은 일상의 전환이 이루어진 과정을 담은 연대기인 셈이다. 타인이나 사회에 의하여 계획이 좌절되고 변경될 수밖에 없었던 순간이나 나의 게으름이나 착오에서 비롯된 어처구니없는 실패들. 그럼에도 불구하고 또 세상은 살아가야 하는 것이기에 차선(次善)을 찾아 기록하고 어떻게든 그 하루를 견뎌낸 궁상스럽지만 뿌듯한 삶의 기록이 함부로 지워져서는 안 되는 것 아닌가. 언젠가 썼던 소설에서 나는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세상의 모든 궁여지책(窮餘之策)은 따지고 보면 최선책인 셈이다.
나는 이미 내년의 다이어리를 선정해 책장에 고이 모셔 두었다. 몇몇 대상이 물망에 올랐으나 작년과 같이 아버지께서 거래하는 '은행에서 무료 배포한 다이어리'를 선택했다. 사이즈가 비교적 큰 편이고 접합 부분의 펼침이 용이해 메모보다 긴 글을 많이 쓰는 내 버릇에 적합한 형태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거의 다 써버린 올해의 다이어리는 새해가 되어도 한두 달 정도는 지니고 다녀야 한다. 아직 계획된 일정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큰 무리를 일으키지 않았던 한해였고 연말의 성과 역시 기대 이상으로 좋았다고 자평한다. 부디 새해에도 삭제(削除)와 수정(修整)과 재고(再考)가 새로운 다이어리 위에서 치열하게 이뤄지기를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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