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심백강의 한국고대사] 동양고전으로 다시 찾는 발해조선의 역사 (20)

발해조선 영토까지 침범한 만리장성 '거짓' 지도
춘추전국시대 방어 목적 '장성'들…진시황때 연결해 '만리장성' 축조
임조∼현재의 북경시 서쪽 종착지
북경 동쪽 명나라때 쌓은 '명장성'…中, 만리장성 끝 명장성까지 늘려
두 장성 혼동시켜 동북공정 시도

만리장성을 평양까지 확대하여 그린 지도도 있다.
만리장성을 평양까지 확대하여 그린 지도도 있다.

▶진시황시대에 출현한 만리장성

중국의 장성長城은 춘추전국시대에 기원을 두고 있다. 성은 외부의 적을 방어하기 위한 군사시설이 주요 목표인데 하, 은, 주 시대에는 중원이 통일되어 있었으므로 장성의 건축에 대한 필요성을 느끼지 않았다.

그런데 춘추전국시대에 이르러 중원이 분열되면서 각국이 난립하는 상태가 되자 여러 나라들은 각자 자기 나라를 다른 나라의 침략으로부터 방어하기 위해 성과 성, 담장과 담장 사이를 연결하여 긴 성을 축조하기 시작했고 여기서 짧게는 수백리, 길게는 천리에 달하는 천리장성이 출현하게 되었다.

춘추전국시대에 쌓은 장성 중에서 가장 긴 장성은 진秦나라, 조나라, 연나라 3국의 장성인데 이들 3국의 장성은 모두 북방민족의 남침을 방어하기 위해 쌓았다.

예컨대 진장성은 진소왕시대에 의거융義渠戎을 방어할 목적으로 건축했고 조나라와 연나라의 장성은 흉노족과 동호를 방어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들 장성은 그 길이가 천리 내외가 되었다. 그래서 춘추전국시대까지는 천리장성은 있었지만 만리장성이란 것은 용어 자체가 존재하지 않았다.

그런데 진시황이 천하를 통일한 이후 동북방의 호족을 방어하기 위해 장수 몽염蒙恬을 보내 기존의 진, 조, 연, 중산국의 장성을 연결하여 전장 만리에 달하는 세계역사상 가장 긴 장성을 쌓았고 여기서 만리장성이란 용어가 출현하게 된 것이다.

북경 북쪽에 있는 거용관. 만리장성을 산해관을 지나 압록강까지 연결해 놓았다.
북경 북쪽에 있는 거용관. 만리장성을 산해관을 지나 압록강까지 연결해 놓았다.
진시황때 쌓은 만리장성 유적. 북경 부근의 명나라때 쌓은 명장성과는 확연히 구분된다.
진시황때 쌓은 만리장성 유적. 북경 부근의 명나라때 쌓은 명장성과는 확연히 구분된다.

▶만리장성과 명장성明長城을 혼동해서는 안된다

만리장성은 진시황이 임조臨洮에서 요동遼東까지 쌓은 장성을 말하고 명장성은 명태조 주원장시대에 산해관에서 북경까지 쌓은 장성을 가리킨다. 그러므로 만리장성과 명장성은 엄연히 구분되어야 하며 이를 혼동해서는 결코 안 된다. 그런데 근대 중국이 이를 혼동한 데서 파생되는 한국의 역사주권에 대한 침해가 매우 심각하다.

예컨대 중국 지도상에서 만리장성을 산해관까지 그려놓은 것을 볼 수가 있는데 이는 만리장성과 명장성을 혼동한 데서 온 결과이다. 그에 따라서 북경 동북쪽의 고조선, 고구려 영토가 마치 진시황시대로부터 중국의 영토인 것 같은 착각을 일으키게 되는데 이는 명백한 역사주권의 침범이자 역사영토의 찬탈인 것이다.

심지어 중국 동북공정의 논리에 따라 만리장성을 고무줄처럼 늘려서 북한의 청천강까지 끌어다 놓은 경우도 볼 수가 있는데 이는 영토야욕이 빚어낸 저질 코미디라고 할 것이다.

▶산해관에서 북경까지는 명나라 때 쌓은 명장성이다

진시황은 천하를 통일했으나 불과 15년 만에 한나라에 의해서 멸망했다. 한나라 초기 북방의 강대한 흉노와 마주하고 있었는데 진나라에서 동북방의 호족을 방어하기 위해 쌓은 만리장성이 건재하고 있었으므로 성을 새로 축조해야할 필요성을 느끼지 않았다.

그래서 한나라 시대에는 기존의 만리장성 일부 구간을 수축한 경우는 있지만 대대적으로 성을 새로 건축하는 공사를 벌인 적은 없다.

위진魏晉시대에는 북방의 흉노세력이 만리장성 안쪽의 중원으로 내려와 관리 노릇을 한 경우가 많았고 군정의 대권 또한 저들의 손아귀에 들어가 있었으므로 장성을 새로 쌓을 필요가 없었다.

당나라 시대에는 초기에 돌궐세력이 위협적인 존재로 작용했으나 전략이 뛰어났던 당태종이 저들의 내란을 틈타 멸망시켰다. 방어의 대상이 사라져 장성을 쌓을 필요가 없었으므로 당나라 때에도 장성을 쌓지 않았다.

당나라 이후 중원을 지배한 요, 금, 원, 청은 그들 자신이 흉노, 돌궐의 후예이고 이들의 발상지가 북방, 동북방이므로 고향을 향해 성벽을 쌓아 가로막을 이유가 없었다.

송나라때는 수도가 지금의 하남성 개봉시에 있었는데 북방은 거란족의 요나라가 차지하여, 한족의 통치범위가 중국의 남방 장강 유역에 국한되었으므로 만리장성의 동북방을 확대할 여력도 필요도 없었다.

다만 "오랑캐를 몰아내고 중화를 되찾자(驅逐胡虜 恢復中華)"는 기치를 내걸어 몽골족 원나라를 멸망시키고 중국의 새로운 주인으로 등장한 주원장이 세운 명나라는 초기에 지금의 남경시에 수도를 정했다가 나중에 북경으로 옮겼다.

수도가 서쪽의 장안 낙양에 있던 한, 당과 달리 명나라는 바로 코앞에서 동북방의 동이족과 마주했다. 그러자 몽골초원으로 쫓겨 간 북원 세력을 위시한 흉노족과 돌궐족의 후예들이 문제로 대두되었다.

또한 명나라는 원나라를 계승하여 집권하였으므로 한, 당시대와 달리 산해관에서 북경까지의 동이족 영토가 중국의 동북방 영토에 편입되어 있었다. 이런 시대적 요구를 반영하여 주원장은 장수 서달徐達을 시켜 산해관에서 북경에 이르는 지역에 장성을 건축하고 개축하는 작업을 대대적으로 벌였다.

따라서 현재 우리가 북경시 부근에서 접하는 팔달령 장성을 위시한 장성은 진시황의 만리장성이 아니라 명장성이다. 특히 산해관에서 북경까지 쌓은 장성은 진시황의 만리장성과는 전혀 관계가 없는 명나라 때 수축한 명장성인 것이다.

▶발해조선시대 만리장성의 동쪽 끝은 북경시 서쪽이다

진시황이 만리장성을 쌓았다는 기록은 '사기' 진시황본기, 몽염열전, 육국표 등에 보인다. 이때 진시황이 쌓은 만리장성의 기점과 종착지는 '사기' 몽염열전에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임조에서 시작하여 요동까지 도달했는데 장장 만여리에 걸쳐서 펼쳐졌다. (起臨洮 至遼東 延袤萬餘里)"

여기서 말하는 만리장성의 서쪽 기점 임조臨洮는 지금의 감숙성 성도인 난주시蘭州市 남쪽 조하洮河 유역의 임조라는 사실에 대해서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은 없다.

다만 만리장성의 동쪽 끝인 요동의 위치에 관하여 여러 가지 이설이 있는데 필자는 지금의 하북성 동북쪽을 가리킨다고 본다.

그 이유는 첫째 진 승상 여불위呂不韋가 편찬한 '여씨춘추'와 유방의 손자 유안劉安이 쓴 '회남자'에 천하의 요새 아홉 군데를 열거했는데 대분大汾, 명액冥厄, 형완荆阮, 방성方城, 효崤, 정井, 영자令疵, 구주句注, 거용居庸이다.

이것이 소위 말하는 진, 한시대 천하의 구새(天下九塞)인데 여기에 산해관은 포함되어 있지 않다. 북경시 서북쪽 창평구에 위치한 거용관이 동쪽의 마지막 관문으로 등장한다는 것은 발해조선시대에 산해관은 존재하지 않았고 만리장성의 동쪽 끝은 북경의 거용관이었다는 유력한 증거이다.

둘째 지금 북경시 서쪽이 발해조선시대 만리장성의 동쪽 끝이었다고 볼수 있는 또 하나의 결정적인 근거를 사마천 '사기'에서 찾을 수 있다.

'사기' 진섭세가陳涉世家에 "진 2세 원년 7월에 조정에서 시골의 빈민들을 징발하여 어양漁陽에 가서 국경 수비를 담당하도록 하였다 (秦二世元年七月 發閭左 適戌漁陽)"라고 하였다.

진나라때의 어양군은 지금의 북경시 밀운현 서남쪽이다. 거용관이 있는 창평구와 지근 거리에 있었다. 이때 만일 만리장성이 산해관까지 연결되어 있었다면 왜 진나라가 국경 방비를 위한 군대를 북경시 동북쪽의 어양군으로 보냈겠는가.

진시황의 만리장성은 북경시 서북쪽에서 멈추었고 지금의 북경시 밀운현 일대에 있던 어양군을 경계로 그 서쪽은 진나라 땅이고 동쪽은 발해조선의 강역이었으므로 국경 수비대를 어양군에 파견했던 것이다.

▶동북공정을 대응하기는커녕 뒷받침하는 한심한 동북아역사재단

한국의 역사주권을 침탈하려는 중국의 동북공정에 대응하기 위해 국가에서 설립한 기관이 동북아역사재단이다.

그러나 동북아역사재단은 중국의 동북공정을 대응하기는커녕 오히려 이를 뒷받침하고 있다. 2013년 미 상원외교위에 보낸 동북아역사재단의 동북공정대응자료가 동북공정이 주장하는 내용과 유사하여 파문을 일으킨 것이 그 좋은 예이다.

8년 동안 45억여 원의 국민 세금이 투입된 동북아역사지도 편찬 사업은 독도를 누락할 뿐 아니라 동북공정 논리를 그대로 추종해 국민적 공분을 사고 폐기되었다.

설립취지와 달리 식민 반도사학의 온상이 되어 150억에 달하는 막대한 국민의 혈세만 낭비한 채 역사주권을 되찾는 역할을 제대로 못하는 동북아역사재단은 환골탈태하여 거듭나지 않으면 안 된다. (역사학박사·민족문화연구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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