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해를 정리하며 새로운 해를 맞이하는 시간이다. 국내 교수들이 선택한 2023년 올해의 사자성어로 '견리망의'(見利忘義)가 꼽혔다. 교수신문이 전국 대학교수들을 상대로 설문조사를 벌인 결과 전체 응답자 1천315명 중에 396명(30.1%)이 응답한 '견리망의'가 올해의 사자성어로 선정됐다. 이로움을 보고 의로움을 잊는다는 뜻의 사자성어다.
견리망의를 선정한 교수들은 대통령의 친인척과 정치인들이 이익 앞에 떳떳하지 못하고, 고위공직자의 개인 투자와 자녀 학교 폭력에 대한 대응, 개인의 이익을 핑계로 가족과 친구도 버리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고 꼬집었다.
2022 올해의 사자성어로 '잘못을 하고도 고치지 않는다'는 의미의 '과이불개'(過而不改)에 이어 2023년을 견리망의로 정리한 것이다. 부끄러운 대한민국의 자화상이다. 시종일관 혐오를 조장하여 국민을 갈라치기하고 수치를 모르는 뻔뻔한 내로남불이 정치 방정식이 되어 버린 대한민국 정치. 사회적 대타협과 협치는 실종되었고 민생은 파탄 났다.
공정과 원칙은 개인의 이익과 정당의 이익을 보호하는 수단으로 변질되었고, 적반하장과 동의어가 되어 버렸다. 세간에는 왜 부끄러움은 국민 몫이냐? 자고 일어나니 후진국. 국가를 신뢰하지 못하고 각자도생해야 하는 나라라는 한탄이 쏟아지고 있다.
영국 싱크탱크 레가툼이 발표한 '2023 번영 지수'를 분석한 결과 우리나라 공적 기관에 대한 신뢰도는 조사 대상 167개국 중 100위에 그쳤다. 세부 항목별로는 사법 시스템에 대한 신뢰 지수가 155위로 가장 낮았고, 군 132위, 정치권 114위, 정부 111위로 주요 기관에 대한 공적 신뢰도는 모두 하위권이다. 사법 시스템 신뢰 지수는 2013년 146위에서 9계단 하락해 사법 시스템에 대한 국민들의 신뢰가 점점 악화되는 것으로 나타났다.
굳이 외국 전문기관의 분석을 인용하지 않더라도 우리 국민 스스로가 너무나 잘 알고 있다. 공적 신뢰뿐만 아니라 개인 간 사적 신뢰 위기도 심각한 상황이다. 2022년 국제 시장조사 업체인 입소스가 수행한 '대부분의 사람들을 신뢰할 수 있습니까?'라는 질문에 대해 우리나라는 23%가 '그렇다'고 답해서 세계 평균 30%에 비해 낮은 수준을 기록했다.
사회적(사적) 신뢰의 위기에는 '21세기 흑사병'이라고도 불리는 '정보전염병'이라는 의미의 인포데믹스(Infor-demics)가 자리 잡고 있다. 쉽게 말해 가짜 뉴스다.
한국언론진흥재단에서 지난 2020년 발표한 자료에 의하면 사람들이 인포데믹스를 접하게 된 경로는 주로 인터넷 포털 뉴스, 언론사 사이트와 같은 소셜미디어다. 소셜미디어의 본격적인 확산으로 과거에 비해 잘못된 정보를 확산시키기 좋은 환경이 만들어진 것이다.
가짜 뉴스는 정치 한복판에서도 버젓이 일어나고 있다. 청문회 자리에서조차 가짜 뉴스를 인용하며 정치 공세에 활용하는 모습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인포데믹스를 막기 위한 법적, 제도적 노력을 해야 할 정치가 제 역할을 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신뢰의 위기는 더욱 심각해 보인다.
커뮤니케이션 전략가이자 저널리스트인 샤사 로보(Sascha Lobo)는 신뢰의 위기(Die große Vertrauenskrise)라는 책을 통해 지금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현대사회를 변동성(volatile), 불확실성(uncertainty), 복잡성(complexity), 모호성(ambiguity)의 영문 첫 글자를 따 '뷰카'(VUCA)라고 부른다.
현대사회는 정치, 경제, 사회, 교육, 역사, 문화 등 거의 모든 영역과 분야에서 복잡하고 불확실한 사회 현상이 두드러지고 있다. 샤사 로보는 "나침반이 없으면 방향을 잃고, 방향을 잃으면 미래는 없다"고 경고하면서 지금 새로운 '신뢰의 나침반'이 필요하다고 조언한다.
신뢰는 국가나 사회 시스템이 정상적으로 작동하도록 하는 가장 중요한 토대이다. 공자는 국가 경영의 요체로 군사력, 경제력, 신뢰 3가지를 꼽으면서 부득이하게 이 중 하나를 버린다면 군사력이고, 또 다른 하나를 버려야 한다면 경제력을 선택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신뢰의 중요성을 강조한 대목이다.
신뢰는 말의 성찬으로 만들어지지 않는다. 지속적이고 일관된 행동이 필요하다. 우리 사회 전반에 걸친 혐오와 불신을 걷어내려면 정치가 제 역할을 해줘야 한다. 2024년은 반성과 혁신, 신뢰 회복의 한 해가 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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