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이덕일의 우리 역사 되찾기] <1> 지워진 국조 단군

우리 민족의 시조 단군, 조선 땐 국가에서 제사 지냈다
"동방에서 처음 천명을 받은 임금" 조선 유학자들 해마다 제사 올려
"국조 무함해 日 내선일체론 보강" 친일 최남선도 단군은 부인 안해

겨울 백두산, 아리랑호에서 찍은 사진이다. 육당 최남선은 백두산은 우리 선조들이 하늘에 제사를 지내던 중심 성소라고 말했다.
겨울 백두산, 아리랑호에서 찍은 사진이다. 육당 최남선은 백두산은 우리 선조들이 하늘에 제사를 지내던 중심 성소라고 말했다.

▶중국의 중화삼조당(中華三祖堂)

중국 하북성(河北省) 탁록(涿鹿)현는 중화삼조당(中華三祖堂)이라는 유적지가 있다. 중국 민족의 세 조상을 모신 곳이라는 뜻인데, 세 조상이란 황제(黃帝), 염제(炎帝), 치우(蚩尤)를 뜻한다.

사마천이 《사기(史記)》를 쓰면서 중국 민족의 시조로 설정한 인물이 황제이다. 그런데 치우는 말할 것도 없고 염제 신농씨도 동이족(東夷族)이지 현재 중국 민족을 뜻하는 화하족(華夏族), 곧 한족(漢族)은 아니다.

사실은 황제(黃帝)도 동이족이지만 이 문제는 다음 기회에 설명하기로 하자. 그런데 중국이 중화삼조당을 준공한 것은 1998년이다. 그 건립자금은 전 세계에 퍼져있는 화교(華僑)들에게 모았다.

전 세계의 화교들을 하나로 모을 수 있는 구심점을 만드는 차원에서 황제, 염제, 치우를 한족의 세 조상으로 설정해 거대한 유적지를 조성했다. 국가차원의 민족시조 만들기 사업이 중화삼조당 유적지 조성사업이었다.

▶해방 이후 부정된 단군

우리는 어떤가? 중국은 한족이 아닌 동이족들을 한족으로 둔갑시켜 전 세계에 퍼져있는 화교들을 하나로 모을 수 있는 구심점으로 삼고 있는데, 우리 역사학자들은 단군을 부인한다. 그런데 단군 부인의 역사는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우리 국민들의 인식에 무언가 나쁜 생각이 들어가 있으면 대부분 일제 식민사학에서 유래되었다고 보면 대부분 적중한다. 이런 점에서 최태영(1900~2005) 전 서울대 법대 학장이 만 100세 때 《문화일보》와 나눈 대담이 주목된다.

"내가 젊었을 때만 해도 한국 땅에서 단군을 부정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습니다. 실증사학을 내세워 단군을 가상인물로 보기 시작한 것은 이승만 정권 때부터지요. 그리고 이미 세상을 떠난 친구지만 이병도 박사의 잘못이 크다고 생각합니다. 이박사는 말년에 건강이 나빴는데 어느 날 병실에 찾아갔더니 죽기 전에 옳은 소리를 하겠다며 단군을 실존인물로 인정했어요. 그 사실을 후학들이 모르고 이박사의 기존학설에만 매달려 온 것입니다.(《문화일보(2000년 1월 3일)》 특별대담)"

최태영 학장은 이승만 정권 이전까지는 단군을 부정하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고 말한다. 이승만 정권이 단군을 부정했다는 것이 아니라 '실증사학'을 내세운 이병도같은 역사학자들이 단군을 부정했다는 뜻이다.

▶국가에서 단군을 제사지낸 조선

조선의 사대주의 유학자들이 중국 은나라에서 왔다는 기자를 높이고 단군을 부정했다고 여기는 사람도 있지만 사실이 아니다.

이성계가 고려왕실을 무너뜨리고 왕위에 오른 다음 달인 태조 1년(1392) 8월 예조 전서(典書) 조박(趙璞) 등은 "조선의 단군은 동방에서 처음으로 천명을 받은 임금이고, 기자(箕子)는 처음으로 교화를 일으킨 임금이니 평양부에서 때에 따라 제사를 드려야 할 것입니다"라고 주청했다. 조선은 이 건의에 따라 매년 철마다 단군 사당에 제사를 지냈다.

조선 초의 권근(權近:1352~1409)은 《삼국사략 서문(三國史略序)》에서 "아! 우리 해동(海東)에 나라가 있었던 것은 단군 조선에서 비롯되었다"라고 말했다. 조선 유학자들도 모두 단군을 민족의 시조로 인식했다.

뿐만 아니라 명(明) 태조 주원장(朱元璋)은 1397년 조선 사신 권근에게 "단군이 가신 지 오래이니 몇 번이나 경장(更張)하였는가?[檀君逝久幾更張]"라는 시를 주었다. 단군이 조선을 처음 개창한 후 몇 번의 왕조가 들어섰는가라는 뜻이다. 주원장이 어떻게 단군에 대해서 알았는지는 알 수 없지만 단군은 중국 황제도 인정하는 우리의 개국시조였다.

▶일본인 학자들의 단군 부정

단군을 처음으로 부인하고 나선 것은 일본인 식민사학자들이었다. 메이지(明治) 시대 나카 미치요(那珂通世:1851~1908)는 1894년에 쓴 《조선고사고(朝鮮古史考)》에서, "(단군)전설은 불교가 전파된 뒤에 중들이 날조한 망령된 이야기로서 조선에서 전부터 전해오던 이야기가 아닌 것은 한눈에 분명하다."라고 주장했다.

같은 해 시라토리 구라기치(白鳥庫吉:1865~1942)는 일본의 학습원대학(學習院大學)에서 발간하는 《학습원 보인회잡지(普仁會雜誌)》에 〈단군고(檀君考)〉를 실어 "대저 단군의 사적은 원래 불설에 근거한 가공의 선담(仙談)에 지나지 않는다."라고 주장했다.

1894년에 일본인 식민사학자들이 단군을 부정하고 나선 것은 조선점령에 대한 사전 정지작업이었다. 그런데 그 논리는 단 하나, 단군의 사적이 《삼국유사》에 처음 실려 있으므로 단군은 승려 일연이 거짓으로 만들어 낸 가공의 인물이란 것이었다. 지금도 한국 강단사학계가 스승으로 여기는 이마니시 류(今西龍:1875~1932)는 《삼국유사》에 나오는 '석유환국(昔有桓國:옛날에 큰 나라가 있었다)'을 '석유환인(昔有桓因:옛날에 불교의 환인이 있었다)'이라고 조작해서 출간했다. 온갖 수단을 다해 단군을 가공인물로 조작했다.

▶완전히 실패한 일본인들의 단군 부인론

그러나 일본인 식민사학자들의 단군부인 기도는 완전히 실패했다. 1949년 2월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반민특위)에 체포되어 마포형무소에 수감된 육당 최남선의 〈자열서(自列書)〉를 보면 명확하다.

최남선은 "민족의 일원으로서 반민족의 지목을 받음은 종세(終世:죽을 때까지)에 씻기 어려운 대치욕이다."라고 말했다. 자신이 친일파로 몰리는 다른 사항에 대해서는 참을 수 있지만 "국조(國祖) 단군을 무함하여 일본인의 소위 내선일체론에 보강 재료를 주었다"는 항목에 대해서만큼은 "국민정신의 근본에 저촉되는 만큼 일언의 변호를 용인치 못할 것이 있는가 한다(《자유신문》, 49년 3월 9일)"라고 반박했다.

다른 비판은 몰라도 단군을 무함했다는 비난은 받아들일 수 없다는 것이다. 최남선은 '불함문화론(不咸文化論)'에서 동양의 문화를 남구(南區)와 북구(北區)의 문화로 나었는데 북구의 문화는 단군의 고도(古都)를 중심으로 발전한 문화로 일본도 이 문화의 일부라고 보았다는 것이다. 자신은 일본문화를 우리 단군문화의 한 부분으로 보았지 일제 식민사학에 동조해서 단군을 부인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최남선은 백(白)자가 들어가는 산은 우리 선조들이 하늘에 제사를 지내던 산인데, 백두산이 그 중심이라고 보았다. 반민특위에 체포된 최남선이 단군을 부인했다는 혐의만큼은 받아들일 수 없다고 항변한 것은 일본인들의 조직적 '단군지우기'가 철저하게 실패했음을 의미한다.

▶해방 후 널리 퍼진 단군부인론

이런 상황이 변하게 된 것은 해방을 되찾은 다음이다. 조선총독부 직속의 조선사편수회에서 자국사를 깎아내리던 이병도·신석호가 '실증사학'을 내세워 단군을 부인하면서 상황이 변하기 시작했다.

일본인들의 '단군지우기'에 저항했던 한국인들은 서울대 국사학과 교수 이병도, 고려대 국사학과 교수이자 국사편찬위원회를 이끌던 신석호 등이 이구동성으로 단군을 부인하자 흔들렸다. 그나마 앞서 최태영 학장이 말한대로 이병도는 말년에 단군을 실존인물로 인정했지만 신석호는 달랐다. 신석호는 이렇게까지 극언했다.

"단군의 기본사료인 일연의 《삼국유사》와 이승휴의 《제왕운기》는 지금으로부터 690여 년 전 고려 말기 충렬왕시대에 이루어진 것으로…단군이 당요(唐堯) 25년 무진(2333 B.C.)에 즉위하여 처음으로 조선을 개국하고 왕험성에 도읍을 정하고 1천여 년 동안 나라를 다스리다가 주무왕(周武王) 기묘(1122 B.C.)에 무왕이 은(殷)나라 유신(遣臣) 기자를 조선왕으로 봉하자 단군은 아사달에 들어가 산신이 되었다는 것이다. 이것을 역사적 사실로 믿는 사람이 어디 있단 말인가? 삼척동자도 믿지 아니할 것이다(〈단군신화 시비〉, 《신석호전집(下)》)

'삼척동자도 믿지 아니할 것'이라고 주장한 신석호는 해방 전은 물론 해방 후에도 그 정신세계는 일본인이었다.

경성제대 출신의 신석호는 "내가 (경성제대) 본과(本科)때 주로 가르침을 받았던 선생은 이마니시 류(今西龍) 박사라는 일본인이었다. 그는 비교적 학자적 입장에서 사실을 왜곡하지 않은 것으로 생각한다(〈야사-나의 중심개념〉, 1978)"라고 말했다.

역사조작의 달인 이마니시 류를 "학자적 입장에서 사실을 왜곡하지 않"은 인물로 보고 평생 존경한 인물이 신석호니 이마니시 류가 부인한 단군을 신석호가 인정할 수는 없었다. 신석호는 "내가 경성제대 사학과를 졸업하고 사회에 첫발을 내디딘 곳이 조선총독부 조선사편수회였다. 내가 일제치하의 대학에서 아무 희망도 없는 조선사학을 전공한 것은 항일정신에서 나온 것(야사-나의 중심개념〉)"이라고도 말했다. "내가 일제치하에서 일본 군대를 지원한 것은 항일정신에서 나온 것"이란 말과 무엇이 다른가?

이병도의 제자들은 주로 보수계열의 역사학계를 장악했고, 신석호의 제자들은 주로 진보계열의 역사학계를 장악했다. 우리나라는 진정한 보수도, 진보도 없다는 말이 자연스러운 것은 역사학계 자체가 그렇기 때문이다.

영국에서 나치역사관을 추종하는 보수 역사학자가 있을 것이며, 프랑스에서 나치 역사관을 추종하는 진보역사학자가 있을 것인가? 우리 사회는 짝퉁 보수, 짝퉁 진보가 한통속으로 식민사학을 옹호하면서 국민들의 역사인식을 좀 먹고 있는 중이다.

이제 갑진년 청룡의 해는 아직도 일본인 식민사학자들을 스승으로 모시는, 한국인의 탈을 쓴 식민사학자들이 지운 단군을 되살리는 희망찬 날개짓으로 비상하는 원년이 되어야 할 것이다.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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