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매일칼럼] 이순신, 전두광, 그리고 괴물

김병구 편집국 부국장
김병구 편집국 부국장

전쟁과 정치는 무엇이 다를까.

전쟁은 결코 일어나서는 안 되겠지만, 발발한다면 이를 회피해서 될 일도 아니다. 군인은 전시에 반드시 적을 죽이거나 제압해야 한다. 그렇지 않고는 나라와 국민의 생명을 제대로 지킬 수 없다.

정치는 전쟁과 달리 회피할 수 없는 인간 삶의 필수 요소다. 또 상대를 죽이거나 제압해야만 하는 전쟁과는 달리 '더불어 살기' 위한 고도의 행위다. 국민들의 삶을 평화롭고 풍요롭게 만들기 위한 상생의 행위이지, 내편 네편을 갈라 적대시하는 분열의 행태가 결코 아니다.

21세기 대한민국 정치가 일견 전쟁처럼 느껴지는 게 안타깝다. 정치를 전쟁처럼 하다 보면 자칫 괴물을 낳을 수도 있다.

영화 '노량: 죽음의 바다'의 이순신과 '서울의 봄'의 전두광은 모두 군인이다. 1598년 12월 16일 노량은 임진왜란 최후의 해상 전쟁터였고, 381년 뒤인 1979년 12월 12일 서울은 전두환의 지휘로 계엄사령관 정승화를 보안사 서빙고 분실로 강제 연행한 쿠데타 발상지였다.

삼도수군통제사 이순신과 보안사령관 전두광은 각각 바다와 육지에서 군을 지휘하는 장수였지만, 너무나 다른 군인이었다.

이순신은 해상 지형과 바람, 파도를 적절하게 이용하면서 과학적이고 치밀한 전략과 전술을 구사했다. 아군의 희생을 최소화하면서 왜군을 잇따라 격퇴시키며 부하들을 이끄는 덕장의 면모를 보였다. 특히 숱한 해전에서 필사즉생(必死卽生)의 각오로 임했고, 결국 적의 총탄에도 "싸움이 급하니, 나의 죽음을 말하지 말라"는 유언을 남기고 전사했다. 조정의 온갖 음해에도 굴하지 않고 참군인의 자세를 견지해 7년 전쟁에서 나라와 백성을 구한 영웅이었다.

전두광은 달랐다. 적을 막고 국민을 지켜야 할 군인을 정치의 영역으로 활용했다. 전두광을 필두로 한 군내 사조직 하나회는 참군인이 아니라 정치군인 양성소였다. 바로 신군부였다. 권력욕에 눈이 멀어 전방부대 군인들을 전선이 아니라 서울로 끌어들였다. 적군이 아니라 아군을 향해 총을 겨누도록 했다. 전두광에게 당시 군인은 국민을 지키는 전사가 아니라 권력의 도구와 다르지 않았던 셈이다. '성공한 쿠데타는 쿠데타가 아니다'란 말까지 파생시킨 것은 한국 현대사의 비극이다.

이순신은 참군인으로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지만, 전두광은 군인이었지만 탐욕의 정치로 권력을 찬탈했다.

현 정부 들어 유독 혐오 정치가 판을 치고 있다. 여야는 서로를 상생이나 협치, 대화의 대상이 아니라 제압하고 굴복시켜야 할 적으로 간주하고 있는 듯하다. 양 극단의 유튜버들은 팬덤(fandom)이라는 미명하에 '가짜 뉴스' '음모론'을 확대 재생산하며 이 같은 혐오 정치를 부추기고 있다.

연예인이든, 정치인이든 그들을 향한 팬덤 자체를 부정적으로 바라보는 시각엔 동의할 수 없다. 상대를 존중하면서 내가 좋아하는 정치인이나 연예인에 열광하는 팬덤 문화는 오히려 사회에 긍정적 에너지를 불어넣을 수 있다. 경쟁하는 상대 정치인이나 팬덤을 적대시하고 파멸시키려는, 혐오로 가득찬 팬덤이야말로 사회악이라고 할 수 있겠다.

"죽이려고 했다"는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 테러범도 이 같은 혐오 정치가 낳은 '괴물 팬덤'의 하나로 여겨진다. 정치가 전쟁처럼 무섭게 느껴질 정도다.

누가 더 국민을 편안하게, 누가 더 국민의 삶을 풍요롭게 할 것인지 경쟁하는, 그런 정치를 고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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