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시인이 들려주는 클래식] <46> 푸쉬킨-스비리도프 ‘눈보라’

서영처 계명대 타불라라사 칼리지 교수

눈보라 이미지. 클립아트코리아.
눈보라 이미지. 클립아트코리아.

겨울 한파가 닥치면 생각나는 음악이 있다. 스비리도프(Georgy Sviridov, 1914-1998)의 '눈보라'. 1990년대 중반 대구문화예술회관에서 대구시립교향악단이 한국 초연하는 연주를 들었다.

'눈보라'는 러시아의 대문호 푸시킨(Aleksandr Pushkin, 1799-1837)의 작품으로, '벨킨 이야기'에 들어 있는 6편의 단편 중 하나다. 이 얘기는 눈보라가 만들어내는 우연과 운명에 관한 이야기이다. 영원한 사랑을 맹세한 두 남녀는 눈보라 속에서 길이 엇갈리고 예측할 수 없는 운명의 폭풍우 속으로 말려 들어간다.

부유한 지주의 딸 마리아는 17살의 낭만적인 처녀다. 그녀는 프랑스 소설을 탐독하면서 자유, 평등, 박애 같은 프랑스 혁명정신의 영향을 받아 신분 질서를 타파하고자 하는, 신세대의 진보적인 여성이었다. 그녀는 휴가차 고향에 온 가난한 소위보 블라디미르와 사랑에 빠지게 되고 부모는 한사코 이들의 결혼을 반대한다. 둘은 사랑의 도피를 결심하고 이웃 마을의 교회에서 몰래 결혼식을 올리기로 약속한다. 하지만 갑작스러운 눈보라 때문에 블라디미르는 제시간에 도착하지 못하고 마리아는 때마침 나타난 엉뚱한 남자와 예식을 올리고 그가 블라디미르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는 기절해버린다.

밤새 길을 헤매다 도착한 블라디미르는 마리아가 다른 남자와 결혼한 사실을 알고 실의에 빠져 전쟁터로 나가 전사한다. 눈보라는 청춘 남녀의 인생을 혼란에 빠뜨리고 파괴한다. 하지만 마리아는 인고의 시간 속에서 자신을 추스리며 성숙해진다. 그리고 새로운 인연과 극적으로 만난다. 얼토당토않은 결혼식을 올린 남자는 한 때의 만용으로 불장난을 친 청년 장교 부르민이었다. 부르민 또한 전쟁터에서 소탈하고 겸손하면서도 양심적인 인물로 바뀌어 있었다. 마리아와 부르민은 젊은 혈기로 무모한 시도를 하였고 그에 대한 대가를 혹독하게 치른 셈이다.

'눈보라'는 1964년 소련에서 영화로 만들어졌다. 이 작품은 나폴레옹 전쟁을 배경으로 두 남녀가 성숙해 가는 과정을 그린다는 점에서 새로운 사회주의 건설에 필요한 인민 교육에 적절한 소재였다. 용기와 감명을 주며 낙관적인 전망을 보여주는 스토리는 "민족적이면서도 사회주의적"인 건전성과 혁명적 낭만주의라는 사회주의 리얼리즘의 미학적 원리까지 담고 있었다.

스비리도프는 영화에 들어갈 9개의 삽입곡으로 '트로이카-왈츠-봄과 가을-로망스-목가-군대 행진곡-결혼식-왈츠의 메아리-겨울 길'을 작곡했다. 그는 '눈보라'에서 가장 인상적인 장면들을 음악으로 재해석해 슬라브적인 정서와 호소력 있는 멜로디로 푸쉬킨의 낭만적이고 사실적이며 극적인 요소들을 마치 영상을 펼치듯 시각적인 음악으로 재현했다. 그중에서도 '로망스'는 사랑의 비극을 담은 바이올린의 선율로 널리 알려져 있다. 암울하고 비장하면서도 애잔한 멜로디는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의 불길한 전조를 들려준다. 작곡가의 뛰어난 내면 묘사와 예술성이 드러나는 부분이다.

음악을 듣다 보면 푸쉬킨의 시가 절로 떠오른다.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하지 말라/ 슬픔의 날은 가고/ 기쁨의 날이 오리니// 마음은 미래에 살고/ 현재는 언제나 슬픈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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