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엄혹한 현실을 응시하는 용기…이란 영화 '노 베어스'

거장 감독 자파르 파나히 신작…영화 찍는 자신이 소재

'노 베어스'. 연합뉴스

튀르키예의 한 도시에 있는 거리에서 이란 출신의 남녀가 위조 여권을 구해 프랑스로 떠날 방법을 궁리한다.

스크린을 가득 채운 이 장면은 갑자기 "컷"이라는 누군가의 목소리와 함께 스크린 속 노트북 모니터 화면으로 들어간다. 노트북 앞에 앉은 이란 영화감독 자파르 파나히가 "감정을 좀 더 절제하라"며 연출 지시를 내린다.

파나히 감독의 신작 '노 베어스'의 오프닝 장면이다. 이를 본 관객은 이 영화가 영화를 찍는 것 자체를 소재로 한다는 걸 알게 된다. 주인공은 파나히 감독 자신이다.

영화 속 파나히 감독은 튀르기예와 맞닿은 국경 지대에 있는 이란의 작은 마을에서 국경 건너편 튀르키예 도시에 있는 배우들에게 원격으로 연출 지시를 내리며 영화를 촬영한다. 인터넷이 열악해 작업은 종종 방해받는다.

이렇게 불편한 방식으로 영화를 찍는 건 파나히 감독의 처지를 보여준다. 이란 당국은 2010년 파나히 감독이 반체제 활동을 했다는 이유로 20년 동안 출국을 막고 영화 제작도 금지했다.

여기에 굴하지 않은 파나히 감독은 영상 일기 형식의 '이것은 영화가 아니다'(2011)라는 작품을 만들고, 이를 저장한 USB 메모리를 몰래 반출해 칸영화제에서 공개하는 등 작품 활동을 계속했다.

극도의 제약 속에서 만들어진 그의 작품은 픽션과 논픽션, 극영화와 다큐멘터리의 경계를 넘나드는 독특한 형식을 띤다.

작품성도 뛰어나 '닫힌 커튼'(2013)은 베를린영화제 은곰상, '택시'(2015)는 베를린영화제 황금곰상, '3개의 얼굴들'(2018)은 칸영화제 각본상을 받았다.

'노 베어스'는 파나히 감독이 국경 너머에 있는 배우들과 영화를 찍는 이야기와 그가 머무르는 이란의 시골 마을에서 겪는 이야기가 교차하면서 전개된다.

이 마을에서 파나히 감독은 골치 아픈 사건에 휘말린다. 마을 전통에 따라 여성이 태어날 때부터 배우자가 정해지는데, 한 여성이 다른 남성을 사랑하게 되면서 빚어진 갈등이다.

이 사건은 여성이 억압받는 이란의 현실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그러나 파나히 감독은 할 수 있는 게 없고, 사건은 파국으로 치닫는다.

영화 촬영도 뜻대로 되지 않는다. 스크린에 비친 파나히 감독의 얼굴은 이란의 현실과 마주한 그의 무력감을 보여주는 것 같다. 어두운 현실에서 예술이 무엇을 할 수 있느냐는 자기 성찰적 문제 제기로도 볼 수 있다.

그러나 엄혹한 현실 속에서 환상으로 도피하지 않고 꿋꿋이 현실을 응시하려고 하는 파나히 감독의 태도는 깊은 감동을 준다. 그가 위험을 무릅쓰고 영화를 찍는다는 걸 고려하면 더욱 그렇다.

'노 베어스'는 미국 뉴욕타임스가 선정한 2022년 최고의 영화 10편에 들었고, 그해 베네치아영화제에서 심사위원 특별상도 받았다. 당시 수감 중이던 파나히 감독은 옥중에서 수상 소식을 들었다고 한다.

'노 베어스'의 영화 속 영화에서 프랑스로 떠나려고 하는 이란 여성을 연기한 미나 카바니는 이란 영화 '레드 로즈'(2014)에서 누드 장면을 찍었다는 이유로 이란 입국이 불허돼 프랑스에서 난민으로 체류 중이다.

'노 베어스'가 이란을 못 떠나는 감독과 이란으로 돌아가지 못하는 배우의 작품이라고 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10일 개봉. 106분. 12세 관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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