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 씨로부터 이러한 사건을 발생케 한 것은 조선정계의 대불상사인 것은 사실이다. 이 불상사가 더 큰 더 혼란한 조선 씨족의 불행을 야기할 가능성이 있음을 진심으로 우려하는 바이다. 그 폭악한 행사 테러를 해방 초에 있어서 송진우 씨의 희생을 보았고 좌익진영의 인민, 자유해방 각 신문과 공산당 등의 커다란 타격과 손실을 알며 테러는 멸망적 망동이며 민족 분열과 독립방해 이외에 아무런 유익함이 없음을 자인하며 신중히 자각한다.' (매일신문 전신 남선경제신문 1946년 7월 20일 자)
1946년 7월 17일 밤 10시. 조선인민당 당수 몽양 여운형은 서울 중구 신당동서 좌우합작 관계자들과 회의를 마쳤다. 몽양은 곧바로 김규식 박사의 아들 집으로 걸음을 재촉했다. 김규식이 병원에 입원해 있어 서신을 그의 아들을 통해 전달할 참이었다. 집에 다다를 즈음 권총을 휴대한 건장한 괴한들이 몽양을 막아섰다. 괴한들은 몽양의 눈을 가린 채 인근 산으로 끌고 갔다. 목이 졸려 죽임을 당하려는 찰나 절벽으로 굴러 구사일생으로 살아났다.
몽양과 좌우합작에 손발을 맞춰가던 김규식은 이미 1946년 6월에 괴한으로부터 자택이 습격당했다. 당시의 해방정국은 좌우 대립과 맞물려 테러로 몸살을 앓고 있었다. 몽양은 해방 후에만 10번의 테러를 당했다. 결국 1947년 7월 19일 총탄에 맞아 세상을 떠났다. 이보다 앞서 송진우는 해방되던 해 12월 30일 피살되었다. 정치인 등의 테러는 개인의 희생을 넘어 민족 전체에 대한 적대 행위라는 비판이 쏟아졌다. 이 같은 테러는 몇몇 정치인이나 특정 지역에 국한되지 않았다.
'대구공동위원회는 발족 직후부터 가장 긴급한 방역, 식량난 문제해결에 당면하여 그동안 민중을 대표해서 도당국에 건의 헌책하는 등 도정에 많은 도움이 되는 바 있었는데~ 제1호 성명(민족 자멸 행동인 테러 행위를 엄중 처단 함)과 식량문제 해결책으로 군정 요망에 따라 협력할 일절 방법을 강구하는 동시 하곡 수집에 관해서 농민에 호소하는 제3호 성명서를 결의 발표하였다.' (남선경제신문 1946년 7월 10일 자)
대구공동위원회는 해방 이듬해 지역의 좌우 정치세력이 힘을 모아 설립했다. 그해 8‧15 기념식을 공동으로 개최했다. 또 식량난 등 대구의 현안에 공동 대응을 모색했다. 대구공위는 발족 후 첫 번째 성명에서 한목소리로 테러 행위의 엄중 처단을 요구했다. 대구에서는 식량난으로 굶주림이 극에 달했다. 그럼에도 테러 규탄을 식량난보다 앞세운 것은 그만큼 테러 피습이 대구와 경북에서도 빈번했음을 말해 주고 있다.
1947년 7월 24일 오전 대구 만경관 앞에서는 "저놈 죽여라!"는 소리가 들렸다. 5~6명의 괴청년이 달려들어 길 가던 남성을 구타했다. 당시 문화공작대의 공연이 이틀 전부터 대구키네마구락부에서 상연 중이었다. 공연 내용이 불량하다는 불만이 우익단체로부터 나왔다. 우익 청년들은 급기야 공연 대표자 심영이 지나가는 만경관 앞길을 지키고 있다가 무차별적으로 폭행했다. 이렇듯 이념과 정치적 잣대로 테러를 일삼았다.
1948년 5‧10 총선거 전후로는 사상과 정치적 목적을 띈 테러가 더 심해졌다. 5월 24일 밤 9시쯤 대구 중구 계산동 주택가에서 큰 폭발음이 들렸다. 전 선거위원의 집에 사제 수류탄이 투척 되었다. 집에 있던 선거위원의 모친은 즉사했고 장남은 크게 다쳤다. 같은 날 안동에서도 전 선거위원 집에 괴한 수십 명이 들이닥쳐 곤봉으로 집주인을 타살했다. 또 다른 선거위원 집은 가옥이 파괴되고 불에 탔다. 선거에서의 극한 대립이 테러 후유증으로 이어졌다.
테러는 뒷날도 계속됐다. 25일 오전 5시경 부내 삼덕동 본청 사찰과의 과장 집에도 사제로 보이는 수류탄이 투척 됐다. 경비를 서던 순경이 부상했고 유리창 수십 개가 깨졌다. 수류탄 테러는 앞뒤를 가리지 않고 이어졌다. 다음 달 23일 새벽에는 대구 동성로 대구지방법원 판사 집에 수류탄 하나가 날아와 가옥 일부를 파괴했다. 양일간에 걸친 수류탄 투척 등으로 3명이 사망했고 3명이 크게 다쳤다. 수류탄, 권총 같은 무기를 이용한 테러의 확산은 인명 살상을 크게 늘렸다.
민주주의의 축제가 되어야 할 선거는 테러로 빛이 바랬다. 제5관구 경찰청(경북경찰청)은 5‧10 선거일까지 40일 동안 대구와 경북에서 살상과 방화, 테러를 합쳐 무려 1천 700명을 검거했다고 발표했다. 선거관계자와 경찰관, 군중 등 사망자만 90명에 이르렀다. 납치와 중상자 등을 합치면 인적 피해만 230명에 달했다. 투표함 손실도 선거전에 23건이나 발생했다. 이 가운데 테러 사건으로 한정해도 119건이었다.
그 시절 테러는 세상을 망하게 하는 인간 파괴와 민족 자멸 행위로 비판받았다. 제1야당 대표가 테러당한 지금인들 다를까. 테러의 본질을 외면하고 인간에 대한 최소한의 공감마저 내팽개친 채 정치적인 잣대로 더 심한 칼질을 해대는 일. 70년 전으로 시간을 돌려봐도 분노를 넘어 참담하지 않을까.
박창원 계명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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