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수의 상징인 십장생도는 궁궐의 장식병풍에서부터 민화까지 그려지며 사랑받았다. 장생(長生)하는 열 가지는 목은 이색(1328-1396)의 '세화십장생(歲畵十長生)'에 해, 구름, 물, 돌, 소나무, 대나무, 영지, 거북, 학, 사슴 등으로 나온다. 새해를 축하하고 복 받기를 기원하던 세화에 십장생이 즐겨 그려졌다.
박생광의 '십장생'은 열 가지를 다 그리지 않았지만 십장생이 주제다. 짙은 파랑의 하늘에 떠 있는 구름을 배경으로 초록 잎이 무성한 상서로운 소나무가 있고 좌우에 붉은 해와 노란 달이 동시에 떠있다. 그 아래로 산과 바위, 사슴과 영지, 나비 등을 그렸고 선면은 여백 없이 모두 채색했다.
박생광은 '십장생'에 보이는 자신의 화풍을 팔십 전후의 나이에 완성했다. 이 무렵 박생광은 자신의 이전 그림은 물론 근현대기의 어떤 화가와도 비슷하지 않은 개성적인 채색화의 세계를 완성했다.
경남 진주에서 태어난 박생광은 진주농업학교에 다니던 1920년 17세 때 일본으로 미술 유학을 떠났다. 교토와 도쿄에서 활동하다 1945년 고향으로 돌아와 광복을 맞았다. 일본에서 화가로 보낸 세월이 25년이다. 귀국 후 방황하던 시기도 있었고 진주, 부산 등지에서 작품을 발표하기도 하다 1967년 홍익대학교에 출강하며 서울로 옮겨갔다. 후배 천경자가 교수로 있으면서 강사로 초빙했기 때문이다.
서울생활 7년 만에 박생광은 도쿄로 간다. 71세였다. 화가로 훈련받고 화가 생활을 한 일본에서 다시 도전해보려 했기 때문이다. 문턱이 높은 일본미술원전에 연이어 입상하는 성과도 거뒀으나 3년 만에 돌아왔다. 마지막 승부를 걸어볼 곳이 결국 일본이 될 수는 없다고 생각한 것이다.
70대 중반부터 박생광은 암중모색 해왔던 소재와 기법을 과감하게 실천하며 정면대결을 시작한다. 단청안료를 활용한 진채로 십장생, 고건축, 목어, 불상, 탈, 장승, 무당, 부적 등 전통적인 소재를 그렸다.
이런 소재 선택이 의도적인가를 묻는 질문에 "내 나라 것을 의식하면서 나온 거지. 한국적인 것을 좋아하니까. 종묘의 건축선은 기가 막힌 겁니다. 집을 짓는다면 종묘를 본떠 짓고 싶어요. 이런 애착이 소재로 나타났을 뿐 한국적이기 위해 쓴 것은 아니야. 그런 일은 없어요"라고 대답한다. 그는 자신이 좋아하고 애착하는 것을 그렸을 뿐이다.
박생광이 전통 속으로 들어가 채색화를 가지고 나와 자신의 세계를 이룬 도약에 주변의 도움이 있었다. 김이환, 신영숙 부부의 후원이다. '십장생'은 이 부부에게 선물한 부채그림이어서 더욱 의미 깊다. 신기루처럼 이뤄낸 만년의 놀라운 도약으로 인해 박생광의 화가로서의 전 생애가 완성됐다.
미술사 연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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