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말 오후 동성로 광장. 둥그렇게 모인 사람들이 깔깔대며 웃고 있다. 그 틈을 비집고 들어가니 은색 조형물 하나가 우뚝 섰다. 이게 뭐가 웃기다는 거지? 그때 조형물이 천천히 움직인다. 로봇 같은 몸짓은 점점 커지더니 관객을 향해 다가와 춤을 춘다. 우스꽝스러운 몸짓과 행동에 관객들은 자지러지듯 웃는다. '아. 사람이었구나!' 조형물 같기도, 동상 같기도. 온몸이 은색인 예술가는 순식간에 좌중을 압도했다.
-시간 내주어 고맙다. 그런데 분장을 지우고 만나니 못 알아 볼 뻔 했다. 자기소개 부탁한다.
▶나는 양철인간으로 활동 중인 조대호라고 한다. 주석을 입힌 얇은 철판처럼 온몸을 은색으로 칠하고 다닌다. 분장한 모습을 보면 최소 30대라고 추측해 주시는데 저는 96년생 올해 27살이다. 양철인간은 2018년도 22살 때 시작했다. 그때 석고 마임이라고 동상같이 행동하는 이벤트 알바를 시작하며 이쪽 세계에 발을 들였다. 사실 내 원래 전공은 팝핀 댄서다.
-댄서 출신이라 몸을 그렇게 잘 쓰는 건가.
▶그렇다고 할 수 있다. 춤과 마임은 몸 쓰는 원리가 비슷하다. 몸을 쓰는 것을 전공으로 하다 보니 양철인간으로 활동하는 것도 어렵지 않다. 춤이 역동적이라면, 양철인간은 로봇 같은 개념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공연 레퍼토리도 그렇다. 처음에 조형물이나 동상인가 싶을 정도로 움직임이 없게 가만히 있다가 로봇스러운 느낌으로 시작한다. 그리고 점점 인간의 형태로 넘어가며 코믹스럽게 관중들과 소통한다.
-온 몸이 은색인 것이 신기하다. 직접 분장을 하는건가.
▶그렇다. 처음에는 집에서 분장을 하고 공연장까지 이동했었다. 차가 없다 보니 대중교통을 이용했는데 부끄럽기도 했다. 요즘은 경험이 쌓여서 현장에서 옷을 갈아입고 칠하고 한다. 은색 옷을 입고 옷이 가릴 수 없는 목이나 얼굴, 손 부분을 은색으로 분장한다. 바디페인팅이라 생각하면 된다. 파우더에 물을 섞어 바르는 형태다.
-자주 분장을 하면 얼굴에 트러블 같은 것도 있을 것 같다.
▶지금 내 얼굴을 봐라. 많이 나았긴 한데 아직 흉터가 있다. 바디페인팅 자체가 피부에 해로운건 아니다. 분장은 지우는 게 무엇보다 중요하다. 하지만 매일 깨끗하게 지우기가 힘들다. 다른 일정 있으면 빨리 지우고 이동해야 하고, 그러면 잔여물이 남아 있으니 그게 누적되는 것 같다. 분장도 분장이지만 양철인간으로 활동하며 몸이 많이 상했다. 겨울에는 부상, 여름에는 화상 위험이 크다. 길거리 공연하다 보면 이런저런 사고가 생길 때가 있다.
-그럼에도 길거리 공연을 꾸준히 하는 이유가 있나. 찾아보니 공연 수요도 많은 것 같던데, 돈 받고 하는 공연이 더 낫지 않나.
▶물론 기관이나 업체 등에서 돈을 받고 무대에 오르는 경우도 많다. 하지만 길거리 공연을 내려놓지 못하는 이유가 있다. 바로 대구 시민들 때문이다. 양철인간 초반에 SNS로 메시지 하나가 왔다. 부모님이 우울증으로 몇 개월 동안 힘들고 웃을 일이 없었는데 지나가다 우연히 양철인간을 보고 함박웃음을 지으시더라는 장문의 메시지였다.
그 메시지를 계기로 '나도 누군가에게 긍정적 에너지 줄 수 있는 사람이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하게 됐다. 한번은 자폐아 관객이 내 공연에 반응하며 춤을 췄던 적도 있다. 자폐아 부모의 감사하단 말을 듣고 또 한번 결심했다. 길거리에서 시민들에게 웃음을 주는 일을 멈추지 않겠다고 말이다.
-그래도 어쨌든 길거리 공연이다보면 예상치 못한 일들이 생길 때도 있을 것 같다. 그리고 관객에 따라 대처법도 다양할 것 같기도 하다
▶그렇다. 길거리 공연이라는 게 360도 둘러싸여 공연을 해야 하니 그만큼 압박감도 심하다. 하지만 늘 다른 관객을 만나는 것. 그게 바로 길거리 공연의 매력인 것 같다. 길거리 공연을 하면서 상황 대처 능력이 많이 는 것 같다. 예를 들어 은색 가방이나 은색 옷을 입고 있는 사람이 보이면 갖고 싶어 하는 제스처를 보인다.
그 가방을 뺏어서 여자 흉내를 낸다던가, 우스꽝스럽게 공연을 이어나가는 것 같다. 선을 적절하게 넘지 않으면서 당사자도 웃을 수 있는 게 그게 코믹이라 생각한다. 최근에는 아이가 로봇을 들고 있더라. 그래서 아이 보고 그 로봇 팔다리를 움직여보라고 하고 나도 그것과 똑같이 로봇처럼 움직였다. 아이가 좋아하니 뿌듯했다. 길거리 공연을 하면 할수록 나의 공연 레벨도 올라가는 것 같다.
-공연보면서 느꼈던 건데 눈빛이 강렬하다. 동상처럼 서 있을 때는 눈빛마저 멈춘 것 같더라.
▶눈은 은색으로 분장을 할 수가 없지 않으냐. 그러니 시선처리가 가장 중요하다. 눈동자를 살아있는 사람처럼 처리하는 것이 아니라 두 눈동자를 정면이 아닌 바깥으로 응시해야 한다. 깜빡임도 최소화해야 한다. 그래야 정말 움직이지 않는 동상 같은 느낌이 나기 때문이다. 이런 시선처리가 힘들어 보통 외국에서는 선글라스 끼고 많이 한다.
-혹시 기억에 남는 관객이 있나.
▶최근 아이와 할머니가 오셨는데 두 번째 보러 오실 때부터는 현수막을 챙겨 오시더라. 애기는 편지랑 그림까지 그려서 주더라. 그렇게 꾸준하게 나를 보러 온다. 최근엔 20만 원씩 관람비도 따로 챙겨 주신다. 길거리 공연은 돈 벌려고 하는 건 진짜 아니다. 지나가면서 가볍게 즐겨 주셨으면 하는 마음 그게 다다.
예술에 이런 장르가 있다는 것을 알리고 싶었고 현대사회가 바쁘다 보니 시간 내서 문화를 못 즐기는 사람들이 많다고 생각했다. 문화사각지대에 있는 사람들도 마찬가지다. 가벼운 문화. 지나가면서 우연히 보시고 즐겨주시면 된다. 그게 내 기쁨이다.
-갑자기 궁금해진 점인데, 양철인간의 움직임처럼 혹시 평소에도 조금 느긋한 편인가.
▶하하. 아니다. 나는 성격이 급한 편이다. 하지만 양철인간으로 활동할 때는 그 누구보다 천천히 움직이려고 한다. 그래서 평소에 그런 훈련들을 많이 한다. 몇 시부터 몇 시까지는 최대한 동작을 일정하게 해보자라든지. 또 이게 마임 훈련도 마임 훈련이지만 몸 관리도 해야 한다. 양철인간이 뚱뚱하면 멋이 없지 않은가. 특히 여름에는 옷을 입으면 온몸이 땀으로 젖어 은색 분장이 다 지워지기 때문에 맨몸으로도 많이 한다. 그러다 보니 군살 없는 몸매를 유지하려고 한다.
-2018년부터 활동을 하셨다고 하면, 코로나도 겪으셨겠다.
▶양철인간 7년 인생 중 가장 힘든 시기였던 것 같다. 그때는 모이면 안 되니 단계가 완화되고서야 길에 나올 수 있었다. 긍정적 메시지를 전하고 싶어서 사비로 마스크를 구해서 나눠주고 손 소독제를 뿌려주는 퍼포먼스도 했다. 사회적 분위기에 맞게 어떻게든 노력했던 것 같다. 크리스마스에는 핫팩을 800개 정도 사서 나눠 드리기도 했다. 그리고 군대를 갔을 때도 활동은 했다. 휴가 나올 때 마다 길거리에 나왔다. 기다려주시는 팬들 생각에 힘들어도 공연을 했다. 군시절 때 '불타는 트롯맨'이라고 티비 출연도 했었다.
-안그래도 전국구로 유명하시더라.
▶양철인간으로 7년째 활동을 하다 보니 알아봐 주시는 분들이 많다. TV 출연도 했었고 실제로 기자님처럼 취재를 응해오시는 분들도 많다. 개그맨 분들도 많이 알고 있다. 작년 부산 코미디 국제 페스티벌에서 수상도 했다.
-대구에서 양철인간을 계속 볼수 있는 건가. 너무 유명해지셔서 서울로 갈까봐 아쉽다. 대구 예술인으로 계속 활동하셨으면 좋겠다.
▶사실 처음에는 댄서였다 보니 주변에서 뭐 그런 걸 하냐며 무시도 많이 당했다. 어떻게 보면 양철인간은 멋지게 보이는 일이 아니다. 우스꽝스럽기도 하다. 하지만 이런 내 공연을 보고 좋아해 주시는 분들이 있어 나는 행복하다. 그리고 이 행복을 전하는 일을 몸이 다할 때까지는 계속하고 싶다. 대구에서 오래오래 공연하고 싶다.
양철인간은 또 거리로 나섰다. 그리고 그의 곁으로 금세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찬바람이 불어도 어째 이곳만은 열기가 가득하다. 양철인간의 뜨거운 열정 때문이 아닐까. 겉은 차가워보여도 속은 뜨거운 이 청년은 오늘도 대구의 웃음을 책임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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