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1년 독일의 소련 기습을 가리키는 정보는 넘쳐났다. 독일 정부 내에서 암약하던 '붉은 오케스트라'라는 반(反)나치 그룹이 그런 정보를 보냈고, 증조부가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친구로, 독일 신문의 일본 특파원으로 위장한 소련 간첩이었던 리하르트 조르게가 도쿄 주재 독일 대사관에서 정보를 빼내 침공 날짜를 실제 침공 날짜(6월 22일)와 이틀밖에 차이가 나지 않는 6월 20일로 찍어줬음에도 스탈린은 믿지 않았다.
독일과의 상호 불가침조약을 철석같이 믿은 데다 독일이 이를 파기하더라도 영국을 패퇴시키기 전까지는 소련을 침공하지 않을 것이란 망상(妄想) 때문이었다. 그러나 소련 침공은 히틀러의 일관된 계획이었다. 히틀러는 소련을 독일인의 '레벤스라움'(Lebensraum, 생활공간) 즉 식민지로 만들겠다는 구상을 1927년 '나의 투쟁'에서 밝힌 이후 한 번도 포기한 적이 없다.
유대교의 속죄일(욤키푸르)에 발발했다고 해서 욤키푸르 전쟁이라고 불리는 제4차 중동전(1973년 10월 6~25일) 초반에 이스라엘군이 엄청난 손실을 입은 것도 안이한 정보 판단 때문이었다. 당시 안와르 사다트 이집트 대통령은 1971년부터 전쟁을 공언(公言)했고, 실제로 1971년부터 이집트는 전략 요충지로 병력을 지속적으로 집결시켰다.
이집트의 기습을 경고하는 정보 보고가 줄을 이었으나 이스라엘 정보기관은 믿지 않았다. 기습 당일인 10월 6일에도 그랬다. 새벽 4시에 가장 신뢰할 수 있는 정보원이 이날 일몰 무렵 이집트와 시리아가 양면에서 공격할 것이라고 보고했으나 이스라엘 정부는 무시했다.
미국 미들베리국제연구소의 북한 문제 전문가 두 사람이 북한 김정은의 잦은 '전쟁' 언급이 허세가 아닐 수 있다고 경고하고 나섰다. 한국과 미국은 김정은이 한미동맹의 강력한 억지력 때문에 소규모 도발은 할 수 있으나 현 상태를 유지할 것이란 생각을 고수하고 있지만 그런 믿음에 집착하는 것은 치명적일 수 있다는 것이다. 얼마나 신뢰할 수 있을지 판단하기는 쉽지 않다. 그러나 과거 여러 전쟁에서 적의 의도를 오판해 재앙을 초래한 사례가 숱한 만큼 경계를 게을리해서는 안 될 것이다. 경계에는 많은 인적·시간적·물적 비용이 들어가지만 조심해서 나쁠 것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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