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끄러움'이 좌우를 가른다. "우파는 비겁하고 좌파는 뻔뻔하다…우파도 부끄러움 모르면 좌파와 똑같아진다." 최근 대구시장이 내뱉은 이 한마디에 공감한다. 똑 부러진 말이다.
"양심 때문에 더 못하겠다." "당의 몰염치, 거짓말을 보고 역겨움을 참을 수 없어 탈당했다." 야당 의원들이 최근 당을 떠나면서 내뱉은 말들이다. 어쩐지 일맥상통하는 듯하다. 부끄러움을 아는 사람과 부끄러움을 모르는 뻔뻔한 사람들이 어찌 정치적 파당에 국한되겠는가마는, 어쨌든 '부끄러움'으로 좌우를 가른 탁견은 놀랍다.
사람이라고 하면 양심, 염치라는 것이 있기 마련이다. 그게 사람의 땅바닥이고, 또한 위의 천정이다. 바닥이란 발아래 땅을 내려다보며 부끄러움을 느끼는 양심이고, 천정이란 하늘을 우러러보며 부끄러움을 느끼는 양심이다. 권력을 손에 넣고 정치한답시고 막 나가는 인간들이야말로 '천지도 모르고 날뛰는' 격이다.
평소 느끼는 꼴불견 정치인들에 대한 소감은 대개 이런 것이다. '표정 하나 안 변하고, 부끄럼 없이, 당당히 거짓말을 해대는데…, 어쩜 저리도 뻔뻔할까.' 이런 모습에 마냥 감탄할 따름이다. 그들의 뇌 구조는 아주 특별하여 수치심과는 담을 쌓은 듯하다. 당당하게 거짓말을 해대고, 그러다 안 되면 룰을 바꾸고, 그것도 안 되면 무조건 패거리로 우겨 밀어붙이는 게 특징이다.
맹자는, 자신의 옳지 못한 행동을 부끄러워하고 남의 옳지 못한 행동을 미워하는 마음을 수오지심이라 하고, 의(義)를 실현하는 단서로 보았다. 의란 인간관계에서 마땅히 지켜야 할 삶의 도리이다. 사회적 정의나 인간관계의 의리가 다 여기에 속한다. 이것이 무너지면 이익과 욕망을 좇는 마음만이 활보하고, 무한 경쟁과 투쟁이 난무한다. 이런 사태를 감시하는 마음속의 거울이거나 자율 경찰이 의라는 덕목이다.
공자는 말한다. "군자는 천하에서 생활함에, 오로지 주장하지도 않고, 그렇지 않음도 없다. 오직 의에 따라 행동해야 한다." 의를 어기는 독재자를 미워하고, 외부의 침략자들을 미워했다. 불의에 대해 의병이 일어났고, 민심이 뒤집혀 역사가 뒤바뀌곤 했다. 수오지심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기를" 바라는 인간의 솔직한 마음이고, 새로운 정치, 새로운 세상을 여는 소중한 기틀이다.
부끄러움이 없는 정치인은 결국 더 큰 혹독한 치욕을 겪게 된다. 그래서 맹자는 "사람은 수치심이 없을 수 없다. 수치심이 없는 것을 부끄럼으로 여긴다면, 그 사람은 삶에서 부끄럼이 없게 될 것이다"라고 했다. 잘못을 저지르고도 요리조리 형벌을 피해 도망 다니며 전혀 부끄러워하지 않는 사람이 늘어나는 세태를, 공자는 어떻게 평가했을까. "정치와 법률 시행에 잘못이 있다"고 단언한다.
최근 야당 대표는 '멋지게 지면 무슨 소용'이냐고 했다. 무조건 이기면 된다는 말 아닌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전과자든 뭣이든, 거짓 선동이든 조작질이든, 한탕 멋지게 이기면 된다는 생각이 무섭다. 어쩌면 이런 생각은 『장자』에 나오는 도둑 척, '도척(盜跖)' 무리가 가진 사상과 통한다고 본다.
도척은 춘추전국시대에 살았던 전설적인 도적이다. 실제로는 공자보다 한참 윗세대의 사람이다. 그의 부하는 수천 명이며, 제후를 공격하고 약탈하며, 심지어 사람 간을 썰어 먹었다는 악명 높은 인물이다. 사마천은 『사기』에서 도척 같은 악인은 천수를 누리고, 백이 숙제 같은 선인은 비참하게 최후를 맞았음에 "하늘은 과연 누구 편이냐?"며 심각한 의문을 품기도 했다.
어쨌든 도척 무리는 "뻔뻔해야 잘 먹고, 잘살다. 그러면 된다"는 철학을 가졌다. "한탕 쳐서 일단 천하를 도둑질하고 나면, 영웅호걸이 된다. 그러면 그 밑으로 현자들이 운집해 고개 숙이고, 무릎을 꿇게 된다." 도척과 그 무리는 거꾸로 도덕을 강조하는 공자에게 혹독히 비판하고 가르치려 든다. "너 같은 자들이 도둑 아닌가? 무슨 인의예지니 도덕이니 하며 세상을 등쳐먹고 있잖냐?"며 겁박까지 한다.
그들은 이렇게 공자 무리의 철학을 비판하거나 중국 역사 속의 성인 군주들마저 천하를 속이고 등쳐먹은 큰 도둑들이라 비난한다. 급기야 도척은 공자(丘)를 도둑으로 몰아 '도구'(盜丘)'라 부르며, 자신을 도척이라 부르지 말아 달라한다. 그를 설득하러 간 공자는 된통 당한 뒤, 부끄러워 얼굴을 못 든 채 도망치듯 귀가한다.
하기사 공자를 가지고 논 도척의 뻔뻔함과 논리에 어쩌면 통쾌함을 느낄 사람들도 있겠다. 그러나 세월이 아무리 흘러도 존중해야 할 가치가 있고, 아껴줄 인간이 있는 법이다. 몰염치한 세상과 인간을 원하는 사람은 없다. 정치도 그렇다. 얼굴을 못 들고 부끄러워할 줄 아는 공자 같은 사람을 원하는가. 아니면 무조건 뻔뻔하게 잘 먹고 잘살면 된다는 도척 같은 사람을 원하는가. 어느 쪽이든 우리 자신의 선택이다.
부끄러움이 살아있는 사회는 양심과 염치 있는 정치를 한다. 정치에도 종교에도 의지하지 않고, 살아 있는 자들의 부끄러움과 그런 기억에 의지하고, 그것을 계승해 가는 가운데 윤리가 생겨난다고 보는 사람도 있다. 부끄러움의 기억에는 개인적인 것도 집단적인 것도, 국내적인 것도 국제적인 것도 있다. 좋은-기쁜 기억도, 나쁜-아픈 기억도 있다. 이런 기억의 관리에서 공동체 윤리의 기초가 마련되어야 한다. 부끄러움이 정치적 좌우의 기준이기를 넘어, 한 나라의 보편적 윤리가 되었으면 한다.
철면피의 뻔뻔함이 아니라 자신과 공동체의 과오에 부끄러워할 줄 아는 그런 정치인이 많아져야 한다. 뻔뻔스럽게, 무조건 잘 먹고 잘살면 끝인가. 진보의 기준은 도덕성이다. 보수의 기준도 도덕성이다. 거짓과 허위의 자격을 가진 자, 그런 사기의 전문 기술자에게 정치를 맡겨선 안 된다. 사람, 사람다움이 먼저다. 사람다움의 기준은 '부끄러워할 줄 아는가, 아닌가'에 있다. 정치는 그 다음이다.
최재목 영남대 철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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