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에게 잘 알려진 프랑스 배우 줄리엣 비노쉬가 출연한 영화 <잉글리쉬 페이션트>(1996)에는 이런 장면이 있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나가던 무렵 얼굴을 알아볼 수 없도록 심한 화상을 입은 신분도 이름도 없는 환자가 야전병원을 전전한다. 기억을 잃은 그를 사람들은 '영국인 환자(English patient)'로 부른다. 치료가 불가능할 정도로 상태가 악화되어 가는 그를 종군 간호사 한나가 헌신적으로 간호한다. 한나는 더 이상 이송이 불가능한 그와 폐허가 된 수도원에 남기로 결정한다. 영국인 환자는 한나에게 자신의 비밀스러운 사랑 이야기를 털어놓고, 영화는 과거와 현재를 오간다.
그러던 어느날 한나는 폭격을 받아 잔해 속에 반쯤 묻혀 있는 피아노를 발견한다. 반가움에 그녀는 어릴 적 배운 바흐의 '골드베르크 변주곡(Goldberg Variation, 1741)'을 친다. 일정한 거리를 두고 하나의 선율을 따라가는 또 하나의 선율, 꾸밈없이 깨끗하고 청량감 넘치는 멜로디는 영화에서 분명 청춘 남녀를 암시하고 있는 것 같다. 두 개의 대위적 선율은 얽히고설키며 서로 대립하고 상호보완하는 관계의 음악을 들려준다. 선율은 전쟁 통의 불확실함 속에서도 이들의 미래가 밝을 것이라는 긍정적 전망도 포함하고 있다. 피아노에 열심인 그녀에게 엄마는 이렇게 말하곤 했다. "넌 피아노를 치다가 신랑감을 만나게 될 거야." 엄마의 예상대로 피아노를 치는 동안 그녀의 새로운 사랑, 킵이 찾아온다.
음악은 언어로 설명할 수 없는 세계의 복잡미묘한 본질을 포착하고 표현한다. '골드베르크변주곡'은 2단의 건반을 위한 하프시코드 연습곡으로, 독창적이고 개성적이며 완벽한 형식미를 갖춘 바흐의 음악 미학을 대표하는 작품으로 꼽힌다. 영화 <잉글리쉬 페이션트>는 스크린을 붉은 사막의 풍광으로 가득 채운다. 그리고 작품의 시작과 대미를 지적이고 절제된 아리아와 변주곡으로 깊은 감정의 소용돌이를 만들어내며 관객의 마음을 지배하고 복종시킨다. 영화와 같은 대중 예술에서도 최적의 음악으로만이 등장인물과 스토리, 영상미를 제대로 발휘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앤서니 밍겔라 감독은 잘 파악하고 있었던 것 같다.
흔히 바흐를 낭만적으로 해석해서는 안 된다는 고정관념이 있다. 실제로 바흐의 곡은 주로 페달과 형용사를 사용하지 않는다. 주제 선율인 아리아는 우아한 존재이자 30개의 변주곡으로 무한하게 변화하며 공간의 기하학과 절제된 아름다움을 만들어낸다. '골드베르크변주곡'은 무언가를 표현하기 위해 애쓰지 않는 최대한의 절제로 더 많은 것들을 표현하고 최대의 감동을 이끌어낸다. 바흐의 곡은 종교 음악이 아니더라도 이러한 종교적인 엄격함이 있다. 음악이 기교의 문제가 아니라 사유의 문제라는 것을 잘 보여주는 부분이다.
바흐의 여러 작품 중에서도 '골드베르크변주곡'은 피아니스트의 음악적 현실을 가장 여실히 보여주는 곡이다. 그래서 피아니스트에겐 가장 먼저 배우고 가장 나중에 연주하는 조심스러운 곡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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