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아뜰리에 in 대구] 권기철 작가 “내 일필휘지는 무아(無我)의 지경에서 탄생”

서예·현대회화의 경계 작업…한 호흡으로 한번에 그려내
순간, 나를 잊고 완전히 몰입

권기철 작가의 작업실. 2월 29일까지 열리고 있는 달서아트센터 초대전 준비가 한창이었다. 이연정 기자
권기철 작가의 작업실. 2월 29일까지 열리고 있는 달서아트센터 초대전 준비가 한창이었다. 이연정 기자
권기철 작가가 자신의 작업실에서 웃어보이고 있다. 이연정 기자
권기철 작가가 자신의 작업실에서 웃어보이고 있다. 이연정 기자

대구 달성군 가창면과 청도 이서면의 경계인 팔조령터널. 터널 옆으로 난 옛 도로에 권기철(60) 작가의 작업실이 있다.

화업 30여 년간 수없이 작업실을 옮기고 마침내 정착한 그의 21번째 작업실이다. 5년 전 땅을 사고 건물을 지은 뒤 그림이 팔리면 조금씩 더 덧대고 꾸민, 손때가 가득 묻은 공간이다. 작업실과 별도로 생활공간을 마련해 대부분의 시간을 이곳에서만 보낸다. 자연과 가까운 건 당연하고, 동네 주민 외에 차가 거의 다니지 않는 한적한 도로라 조용하게 작업하기에 최적이라는 게 작가의 얘기다.

일사 석용진 서예가가 그의 작업실을 편안하고 깨닫기 좋은 공간이라는 뜻의 '일오처(逸悟處)'라 명명했다. 그는 이곳에서 그림과 음악, 책을 한껏 즐긴다. "이따금씩 음악회나 연극이나 영화를 보는 것 말고는 다른 것들에 큰 관심이 없어요. 운동 외에 잡기(雜技)가 없어서 이렇게 삽니다. 하하."

그는 새벽 5시반쯤 일어나 헬스장에서 2시간 가량 운동을 한다. 체력을 유지하는 것이 작업에서 가장 중요하기 때문. 작업실에 돌아와 낙엽을 쓸거나 마당 곳곳을 살펴보며 작업 방향이나 잡념을 정리하고 나면 그의 하루가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작가의 작업실을 찾았던 날은 그의 달서아트센터 초대전(1월 24일~2월 29일) 개막을 며칠 앞둔 시점. 작업을 갓 마무리한 작품들이 신생아실 속 뉘여진 아기들처럼 전시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1993년 봉성갤러리에서 첫 개인전을 연 뒤 만 30년 만의, 만 60세에 여는 60회 개인전"이라며 "그간 먹 작업을 많이 보여줬기에 이번 전시에서는 80%가 색 작업으로 채워질 예정"이라고 말했다.

초등학생이 되기 전 이미 붓글씨를 썼던 작가는 서예와 현대회화 그 경계에 있는 듯, 독특한 작업을 선보여오고 있다. 붓 대신 먹통에 구멍을 내 종이 위에 일필휘지로 선을 그려낸다. 칼날 같이 매끈한 면과 먹이 흩뿌려진 거친 면이 동시에 나타나는 그만의 선은 전각에서 착안한 기법이다.

"내 먹 작업은 '일즉다 다즉일(一卽多 多卽一)', 즉 하나와 전체, 전체와 하나는 같다는 함의를 중심으로 한다. 하나의 이치가 곧 전체를 의미한다는 얘기다. 먹 작업에 등장하는 모든 선은 결국 한 일(一)자의 변주다. 동그라미든, 뿔이든 한 일자의 맥락에서 뻗어나가는 것"이라는 게 작가의 설명이다.

권기철 작가의 작업실. 보통 1층에서 먹 작업을, 2층에서 색 작업을 한다. 이연정 기자
권기철 작가의 작업실. 보통 1층에서 먹 작업을, 2층에서 색 작업을 한다. 이연정 기자
권기철 작가가 달서아트센터 전시 출품작을 마무리하고 있다. 이연정 기자
권기철 작가가 달서아트센터 전시 출품작을 마무리하고 있다. 이연정 기자

선명한 색채와 추상적인 표현이 돋보이는 그의 색 작업은 밝고 경쾌하다. 그는 "컬러 작업은 그림으로 쓰는 일기다. 나만 알고 싶지만 들켜도 상관 없는 일기이자, 관람객들이 각자의 방식대로 읽었으면 한다"고 했다.

먹 작업이든 색 작업이든, 작품을 뚫고 나오는 에너지는 상당하다. 그의 표현을 빌려, '몸으로 그린' 작품들을 보고 있으면 자신을 잊어버릴 정도로 몰두한다는 '무아지경'에 이르지 않고서야 이렇게 그릴 수 없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무아지경이요? 매번 실제로 그러한 경험을 합니다. 집중해서 한 호흡에 작업을 끝내야하기에 그 호흡 조절이 굉장히 중요하죠. 사실 작업의 시작부터 끝날 때까지의 궤적 안에 내가 대체 뭘 했는지 모릅니다. 행위의 순간에는 내가 없습니다. 생각이 비워지는 단계가 있어요."

이번 60회 개인전에서 그는 새로운 작품을 선보인다. 전시장에 16년간 작업 전 손을 푸는 용도로 사용했던 신문지 더미와 함께, 아크릴 물감 찌꺼기를 투명 FRP에 굳힌 입체 작품을 설치한다. 그것은 곧 그가 작업을 사랑한 흔적이자 배설물인 동시에 시간의 흐름이 켜켜이 쌓인 세월이자 역사의 결과물이다.

그는 "전시 타이틀이 '의미 없는' 이다. 30대에는 음악과 소리를 주제로 한 작품을, 40대는 '봄 간다', 50대에는 '어이쿠' 시리즈를 이어왔는데 어느 순간 작품의 제목을 다는 게 상투적으로 느껴졌다"며 "의미를 보여주는 건 의미가 없고, 그냥 작품을 볍씨 뿌리듯 뿌려놓으면 결국은 관람객이나 비평가, 세상이 의미를 알아주리라 믿는다"고 말했다.

만 60세. 작가는 다시 되돌아보니 그림과 붓글씨 외에는 특별히 즐거움을 느낀 것이 없다며, 작업의 순간순간을 즐겨왔다고 했다. 자신만의 뮤즈와 여행, 음악, 문학이 오로지 영감을 얻는 대상이었다고 얘기하는 그의 눈빛에서는 오롯이 순수함과 열정만이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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