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야고부] 관례와 의전

김태진 논설위원
김태진 논설위원

왕이 상징적 존재이던 중세 일본 왕실에서는 명절 선물 준비가 큰 부담이었다. 귀족들과 선물을 주고받았는데 약소한 것을 선물하자니 체면이 말이 아니었다. 받은 것 중 귀한 걸 열어 보지 않고 다시 선물로 보내는 수를 썼다. 그런데 당시 귀한 선물로 인식되던 것 중에 도미가 있었다. 보관이 까다로운 생물이 몇 차례 손을 거치면 성할 리 없었다. 상한 냄새가 나 열어본 이가 마지막 수취인이 되는데 폭탄 돌리기가 된 명절 선물 관례다.

대구시가 근무 4대 혁신 방안을 내놨다. '인사 철 떡 돌리기' '계획 없는 회식' 등을 자제하자는 거다. 불합리한 관행을 없애고 MZ세대 공무원의 퇴직을 막자는 취지다. 인사 철 떡 돌리기는 감사의 의미를 전하는 미풍양속처럼 보였지만 근무시간에 주로 돌리다 보니 업무 공백이 생겼다고 한다. 방문 일정까지 조율해야 했다니 주객전도가 따로 없다. 인사치레를 하지 않으면 흠이 된다. 진퇴양난의 관례로 비쳤을 것이다.

본업 외에 신경 쓸 게 많으면 혼돈의 카오스가 열린다. 예컨대 점심시간에 가까워질수록 신입 직원들의 머릿속은 하얘진다. 메뉴 결정부터 난관이다. 상사가 전날 술을 마셨는지, 심기가 어떤지 살펴야 한다. 식당에서도 수저 놓고, 물 따르고, 반찬 리필에 신경 쓰면 밥이 어디로 넘어갔는지 알 수 없을 지경이다. 내가 이러려고 몇 년씩 젊음을 바쳐 시험을 치렀나 싶은 자괴감이 들 만하다.

의전에 밝을수록 상사의 마음을 살 수 있다. 그러나 미래를 담보하는 긍정적인 요소는 아니다. 진짜 타파할 건 예의라고 합의된 관례, '의전'일지 모른다고 추측하는 까닭이다. 의전은 MZ세대의 눈에 자신들이 합의한 적 없는 윗세대의 문화다. 로마에 가면 로마법을 따라야 한다지만 그 법에 동의하기 어렵다는 게 속내다. 어떤 직장이든 비슷한 관례가 있다면 기왕지사 돈이라도 더 주는 곳으로 가겠다는 것이다.

혁신은 단순화에서 온다. 신경 쓸 것들이 하나씩 없어져야 일의 능률이 오른다. 특수부대일수록 엉뚱한 기강 잡기가 없다. 굳이 그러지 않아도 스스로 한다. 스스로 알려 하지 않으면 훈련에서 실수를 한다. 실전이라면 죽음을 의미한다. 본업에 충실하도록 하는 게 가장 확실한 혁신 방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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