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화요초대석] 정치폭력을 막는 ‘따뜻한 보수’가 필요하다

김영수 영남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김영수 영남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한국 정치가 폭력의 문 앞에 섰다.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에 이어 배현진 국민의힘 의원이 피습당했다. 범인은 돌에 금이 갈 정도로 수십 차례 머리를 내리쳤다. 근처 레스토랑 직원들이 제지하지 않았으면, 목숨이 위태로웠을 것이다. 배 의원은 "사건 당시 '이러다가 죽겠구나' 하는 공포까지 느꼈다"고 한다. 이 대표를 공격한 김 씨도 '살해를 결심'했다. 왜 이런 일이 늘고 있나?

정치 폭력은 후진국의 정치적 질병이다. 하지만 지금은 선진국도 예외가 아니다. 2년 전 일본의 아베 전 총리가 피격당해 사망했다. 세계 민주주의의 모델 미국의 정치 폭력도 매우 심각하다. 2021년 국회의사당을 습격한 1·6사태가 대표적이다. 선거에서 진 현직 대통령 트럼프가 "나라를 되찾기 위해 지옥같이 싸우라"며 선동하고, 시위대를 '위대한 애국자'로 불렀다.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 조지프 스티글리츠 미 컬럼비아대 교수는 미국의 정치 폭력이 트럼프 개인의 문제라기보다 '국가적인 깊은 질병의 징후'라고 본다. 미 싱크탱크 외교협회(CFR)의 '2024년 예방해야 할 위협 우선순위' 보고서가 내린 결론도 같다. 이 보고서는 금년 미국 안보의 가장 중대한 위협으로 국내 정치 폭력을 꼽았다. 2023년 미 브루킹스연구소 여론조사에 따르면, '폭력을 행사해서라도 미국을 구해야 한다'는 민주당 지지자가 13%, 공화당 지지자가 33%에 이른다. 미국은 심리적으로 이미 내전 상태다.

정치인의 신변 위험도 심각하다. 지난해 미 하원의장 선거 때, 공화당 강경파 짐 조던 의원에 반대한 퍼거슨 의원 가족은 살해 협박에 시달렸다. 베이컨 의원의 아내는 "침대 옆에 장전한 총을 두고 잠든다"고 했다. 1·6사태 조사특별위원회 소속 의원 2명은 낙선운동과 살해 협박에 시달렸다. 트럼프를 기소한 검사, 판사들도 같은 위협에 노출되어 있다. 금년 11월 4일 미 대통령 선거는 결과와 상관없이 "민주주의의 종말이 예고된 선거"라는 우려가 크다.

지금은 많이 잊혔지만, 한국 현대 정치사도 폭력으로 점철되었다. 해방 후 좌우 갈등이 가장 극단적이었다. 결국 6·25전쟁으로 이어져 수백만 명의 피가 강산을 적셨다. 자유당 정부와 군사정부 때는 이정재나 용팔이 같은 정치 깡패들이 각목을 들고 거리를 활보했다. 1969년에는 김영삼 신민당 원내총무 승용차에 질산을 투척했다. 1980년대 대학 캠퍼스는 돌멩이와 화염병, 최루탄이 난무했다. 1987년 민주화 이후 비로소 심각한 정치 폭력이 사라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최근 들어 정치 폭력이 국민의 생활 속까지 스며들었다. 전 시대의 정치 폭력은 주로 정치권에서 일어났다. 그러나 이재명, 배현진 의원 사건의 범인은 모두 보통 사람들이다. 이 대표를 찌른 김 씨는 원룸 전문 공인중개사다. 평소 조용하고 성실한 성격의 소유자라고 한다. 배 의원 사건의 범인 A는 중학생이다. 정치적 양극화가 깊어지면서 정치적 증오가 이렇게 일상 깊숙이 들어왔다.

스테판 슈미트 아이오와대 교수는 "전 세계적으로 나타나는 정치의 극심한 폭력성은 세계가 공통적으로 안고 있는, 긴장된 환경에 수반되는 피해(collateral damage)일 수 있다"고 본다. 선진국까지 번진 정치 폭력 문제가 한 나라를 넘어 글로벌하게 얽혀 있다는 지적이다. 팬데믹 현상이나 우크라이나 전쟁, 이스라엘-하마스 전쟁이 그런 사례일 것이다. 불평등은 정치 폭력의 고전적 근원이다. 세계화와 정보화가 급속히 진행되면서 불평등의 어두운 그늘도 짙어졌다. 국제구호단체 옥스팜의 2023년 보고서에 따르면, 코로나19가 휩쓴 2020~21년 창출된 부의 63%를 상위 1%가 가져갔다. 하위 90% 몫은 겨우 10%였다.

민주화 이후 지난 30여 년간 한국의 불평등은 지속적으로 악화되었다. 2022년 현재 상위 1%가 국민 소득 14.7%, 상위 10%가 46.5%를 차지한다. 불평등도가 미국 다음으로 높다. 출산율은 세계에서 가장 낮고, 자살률은 가장 높다. '절망감이 커지면 대중은 적에 대한 혐오, 부자에 대한 질시 같은 낮은 감정에 지배된다.'(하에이크) 히틀러 같은 정치 빌런들이 이 감정에 불을 붙여 권력을 장악하고, 끔찍한 참극을 벌인다. '따뜻한 보수'가 필요한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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