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기고] 조선 현판, 마음을 새기다

이무열 대구문화관광해설사회장

이무열 대구문화관광해설사회장
이무열 대구문화관광해설사회장

국립대구박물관에서는 지금 '나무에 새긴 마음, 조선 현판' 104건 115점이 전시되고 있다. 이번에 선보인 현판들은 2022년 국립고궁박물관에서 '조선의 이상을 걸다, 궁중 현판' 특별전에 출품한 현판 중 일부와 한국국학진흥원에 소장된 영남 지역의 현판을 비롯해 여러 박물관에서 출품한 현판들이다.

500년 조선 왕실의 생활과 문화와 기록을 보여주는 700점이 넘는 궁중 현판과, 189개 문중과 서원에서 기탁한 한국국학진흥원의 현판 550점은 '한국의 편액'이란 이름으로 이미 각각 2018년과 2016년 세계기록유산 아시아태평양 지역 목록에 그 이름을 올린 바 있다.

이번 전시는 4부로 구성됐다. 1부는 현대 서예가와 소목장, 단청장이 '궁중현판전'이라는 글씨로 현판을 만드는 과정을 동영상을 통해 자세히 보여주고 있다. 2부는 건물의 이름과 자연과 사람의 어우러짐이 있는 공간의 인연을 담았다. 3부는 궁중현판 글씨를 통해 국가의 안녕과 평화를 꿈꾸며 백성이 잘 살도록 애쓴 성군의 마음을 엿볼 수 있다. 4부는 궁중과 민간의 현판을 통해 인연과 이상이 조화를 이루어가는 세상을 소망했던 옛사람들의 자취를 더듬어 볼 수 있다.

이번 전시회에서 눈길을 끈 현판은 단연 추사 김정희가 쓴 '단연죽로시옥'(端硏竹爐詩屋)이다. 중국 서강 골짜기에서 나는 돌로 만든, 단 한 번 만나 평생을 곁에 둔다고 할 정도의 단계벼루와 차를 끓이는 화로와 시를 짓는 집이라니. 예서를 바탕으로 전서에 가까운 김정희의 서체를 물끄러미 쳐다보다가 내 마음을 홀랑 빼앗기곤 했다.

전라도 절집에서 대웅보전 현판으로 더러 만난 원교 이광사는 조선 후기의 뛰어난 서예가이다. 원교가 그 아들 이긍익의 공부방에 써준 '연려실'(燃藜室)이란 현판은 중국의 학자 유향이 책을 쓸 때 신선이 명아주 지팡이를 태워 어둠을 밝혀 주었다는 데서 연유했다. 아버지의 바람은 30년 세월에 걸쳐 이긍익이 뛰어난 사서(史書)인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을 저술하면서 완성된 것이 아닐까. 제일난실(第弌蘭室)에는 석파(石坡)란 호와 대원군장(大院君章)이라는 인장을 새겼는데, 일세를 풍미한 이하응의 난초가 석파란(石坡蘭)이라 불리며 청나라에서도 유명세를 떨친 것은 허투루 생겨난 말이 아닌 것 같았다.

서애 류성룡의 말씀을 미수(眉叟) 허목(許穆)이 멋들어진 전서체로 쓴 '충효당'(忠孝堂), 대구 출신의 석재 서병오가 용두방천 정자에서 필묵의 정취를 한껏 드러낸 '우세정'(又洗亭), 영친왕이 6세 때 쓴 글씨 '수진지만'(守眞志滿)도 좋지만 영조의 어제어필 현판인 '균공애민 절용축력'(均貢愛民 節用蓄力)은 용과 봉황머리 조각과 꽃무늬로 테두리를 장식한 검은색 바탕에 금색 글씨로 새겨 현판이 이토록 아름다울 수 있을까, 안복을 누리기에 부족함이 없을 것이다.

당대 최고의 선비이자 문필가들이 쓴 현판에는 글쓴이나 낙관 같은 것이 없는 경우도 많다. 스스로 공부나 수양이 부족하다며 그 이름을 세상에 드러내는 것을 삼간 겸양지덕을 엿볼 수 있다.

이번 국립대구박물관의 현판 전시는 2월 12일까지 이어질 예정이다. 아직 이 귀한 '나무에 새긴 마음, 조선 현판' 전시를 보지 못한 분들은 아이들을 데리고 꼭 다녀가시라고 권하고 싶다. 설사 한문을 모른다 해도 전시 설명이 자세하게 돼 있어 관심을 갖고 보는 만큼 보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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