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조향래의 소야정담(小夜情談)] ‘트로트’가 무엇이길래

조향래 대중문화평론가
조향래 대중문화평론가

'복면달호'라는 영화의 주인공 봉달호는 록 스타를 꿈꿨지만, 연예기획사에 전격 발탁되면서 얼떨결에 트로트 가수가 되었다. '봉필'(봉달호+뽕짝feel)이란 예명으로 앨범을 낸 달호는 공중파 무대에 오를 때 부끄러워서 복면을 했다. 그 신비주의가 오히려 대중의 관심을 모으며 트로트의 황태자로 급부상하지만, 인기에 버금가는 시련과 실연까지 겪게 된다. 그렇게 달호가 얻은 것이 트로트의 재발견이었다.

대부분의 록 음악인들에게 트로트 즉 '뽕짝'은 먹고살려고 마지못해 하는 것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시절들이 있었다. 트로트는 구닥다리 음악으로 왠지 싼티가 나는 서민의 노래라고 여기기 일쑤였다. 더러는 천박하거나 즉물적인 불륜의 음악으로 치부하기도 했다. '성인가요'라는 용어가 그 불편한 상징이다. 성인가요는 고도성장과 경제 호황의 몽환에 취해 흥청거리던 밤문화의 끈적한 여흥을 대변했다.

선정적인 가사와 리듬이 출렁거렸던 지하 룸살롱의 트로트와 카바레의 뽕짝이 그랬다. 처음 본 남녀의 찰나적이고 내밀한 욕망까지 껴안아야 했던 것은 트로트의 얄궂은 운명이었을까. 뽕짝은 그렇게 우리 대중음악에서 트로트에 대한 매우 부정적이고 저급한 위상을 웅변한다. 그나마 전통가요는 고상한 명칭이다. '전통가요'는 '가요무대'처럼 품격있는 방송 프로그램에서 사용하는 용어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 민요와는 근원이 다른 트로트를 전통가요라고 부르는 것도 한계가 있다. 트로트는 1920,30년대 일본에서 들어온 엔카의 한국식 버전임을 부정할 수 없다. 그리고 100년의 세월 동안 굴곡진 역사의 격랑과 함께 하며 한국인의 감성을 흠뻑 머금은 한국적 대중음악으로 정착한 것이다. 우리 전통음악이라고 애써 주장할 필요도 없고, 더 이상 왜색 시비에 휘둘릴 까닭도 없다.

우리나라 대중음악의 역사에서 트로트만큼 숱한 시련을 겪으면서도 오랜 국민적 사랑을 받아온 장르도 없을 것이다. 트로트의 가락과 가사는 정한과 신명을 아우른다. 그런 측면에서 한과 흥의 경계를 넘나드는 우리 민족의 노래 '아리랑'을 닮았다. 다른 장르의 가요로는 채울 수 없는 그 무엇이 있는 것이다. 숱한 파란과 곡절 속에서도 트로트가 모닥불 같은 생명력을 유지해온 까닭이기도 하다.

통기타와 포크송의 청년문화 열풍이 거세던 1970년대에도 트로트의 인기는 숙지지 않았다. 비결은 트로트의 변신과 진화였다. '오동잎'의 최헌, '돌아와요 부산항에'의 조용필, '사랑만은 않겠어요'의 윤수일 등이 '트로트 고고'와 '트로트 록' 돌풍을 일으켰다. '피리 부는 사나이'의 송창식과 '불 꺼진 창'의 이장희, '장밋빛 스카프'의 윤항기 등이 다양한 장르의 리듬을 덧입힌 '세미 트로트'도 인기를 누렸다.

21세기 들어서는 '네오 트로트'(Neo trot)'라는 신세대의 계보를 열며 르네상스 시대를 구가하고 있다. 갖은 폄하와 멸시에도 트로트는 한결같이 되살아났다. 1965년의 이미자, 1985년의 주현미, 2005년의 장윤정 등에 의한 화려한 부활이 그 대표적인 사례들이다. '트로트계의 신형 엔진'이라 불렸던 장윤정과 박현빈의 상업적 성공은 젊은 취향과 경쾌한 트로트의 가능성을 입증했다.

그러나 다른 장르와의 융복합은 트로트 고유성 상실에 대한 우려와 이종교배를 통한 생명력 연장이라는 긍정의 시각이 공존한다. 멜로디의 유사성은 '그 노래가 그 노래'라는 지탄을 부른다. 지나치게 빠른 템포와 경박한 노랫말은 음악적인 감성과 여백의 미를 차단해 버린다. 그저 뒤집고 굴리는 감각만으로는 트로트의 진정한 계승도 미래도 보장할 수 없다는 얘기다.

방송 프로그램에서 10대의 설익은 트로트 가수를 양산하며 희희낙락하는 세태에 혀를 차는 사람들도 많다. 100년 역사의 트로트에는 한국인의 고유한 정서와 낭만이 진득하게 배어있다. 뽕짝 논란 속에서도 트로트가 건재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사회적인 아픔과 대중의 욕구에 부응해온 트로트의 사실성 때문일 것이다. 누구든지 내 이야기를 담고 있다는 공감과 공유의 확산이 주효한 것이다.

저항적 포크 가수인 정태춘의 '나 살던 고향'과 박노해의 '노동의 새벽' 싯귀가 담긴 김현성의 '평온한 저녁을 위하여'도 트로트곡이다. 왠지 궁합이 맞지 않고 이질적인 듯한 이 변주에 트로트 부활의 한 해법이 숨어있는지도 모른다. 당장의 인기에 영합한 복고적인 모방이나 갈라파고스 섬 안의 진화가 아닌, 형식과 내용에 있어서 보다 폭넓고 깊이있는 트로트의 새로운 지평을 열어가야 한다.

조향래 대중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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