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의 독일은 유럽연방 내에서도 최고의 입지를 다지고 있다. 전쟁의 폐허를 딛고 유럽 최고의 경제대국으로 우뚝 섰다.
일본과 달리 "과거 청산 부문에서 세계 최고의 수출국"임을 자부하는 독일은 이제 성공적인 과거 청산에 대해 도덕적 우월감마저 과시할 정도라고 저자 하랄트 얘너는 표현한다. 하지만 독일인의 과거사 청산은 과연 '모범적'이었을까?
이 책은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것처럼 전후 독일의 재건이 가능했던 이유가 과거사 청산이라는 철저한 자기반성과 근면성 때문이었다는 것은 착각이라고 매서운 자기 비판을 가한다.
저자는 '제2차 세계대전 패망 후 10년, 망각의 독일인과 부도덕의 나날들'이란 부제를 단 이 책을 통해 "전후 독일 사회과 진실과 마주하는 면에서 무능했다. 그들의 억압(외면) 능력 덕분에 후손들이 막대한 이익을 본 것은 부인할 수 없다"고 지적한다.
그는 포화가 멈춘 잿더미 속에서 독일인들의 어떻게 '영혼의 타락'과 '홀로코스트의 공포'를 딛고 경제 재건을 이뤄내고 오늘날 우리가 '독일'이라 부르는 나라를 만들었는지 1945년부터 1955년 사이 공식문서에서부터 개인의 일기, 수기, 문학작품, 신문, 잡지, 영상자료, 심지어 유행가 가사까지 방대한 자료를 통해 독일인들의 집단적 망각과 외면을 규명한다.
전쟁은 독일에 약 5억㎥에 달하는 폐허 더미와 6천만 명의 사망자를 남겼다. 여기에다 폭격으로 대피한 900만 명, 난민과 실향민 1천400만 명, 강제 노력와 수용소에서 풀려난 1천만 명, 전쟁 포로로 잡혔던 이들 수백만 명이 갈 곳을 잃고 길거리를 헤맸다. 소련 붉은 군대의 조직적 성폭행의 아픔도 그대로 남았고, 가족은 해체됐으며, 전후 1946년과 47년까지 심각한 겨울 기근도 지나야 했다.
옛 질서는 사라졌지만 새 질서는 아직 모호한 혼돈만이 가득한 이 시간을 저자는 '늑대의 시간'이라고 불렀다. '인간은 다른 모든 인간에게 늑대'라는 말이다.
이 지옥같은 시간을 지나면서 독일인들이 과거를 깊이 반성했을 거라 짐작하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았다. 당장 먹고 사는 문제의 해결이 먼저였다. 도둑질과 약탈, 암거래를 해서라도 한 목숨을 부지하는게 당면 과제였다. 흔히 독일인 하면 떠올리는 고지식함과 정직성은 당시엔 찾아볼 수 없었다. 이에 대해 하랄트는 "생존 욕구는 죄책감을 차단한다. 이는 전후 시대에 관찰되고, 인간뿐 아니라 인간 자아의 토대에 대한 믿음까지 의심하게 만드는 집단현상"이라고 진단했다.
아이러니 한 것은 독일인들은 그 와중에도 문학을 향유하고 다시 카니발을 즐기고, 오케스트라와 오페라를 무대에 올리고, 토론을 즐기고, 휴양지로 휴가를 떠났다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홀로코스트는 철저히 망각됐다.
당시 독일인들은 그들 스스로를 마약과 같은 나치즘 그리고 히틀러라는 절대 악에 희생된 '희생자'라고 생각했다. 전쟁이라는 야수가 '이쪽이건 저쪽이건 보통 사람들'을 덮쳤다는 전쟁 자체에 일반적인 책임을 묻는 논리도 횡행했다. 저자는 "독일인들의 고통을 다른 민족의 어떤 고통도 따라오지 못할 만큼 최상급으로 표현한 글은 언론과 소책자, 논문에 넘쳐난다"면서 "그런 글의 저자들은 진정한 희생자들에 대한 일말의 고려도 없이 오직 자신들이 고통에만 빠져 허우적거린다"고 썼다.
과거 청산은 시작된 것은 1963년부터 1968년까지 프랑크푸르트 아우슈비츠 재판이 진행되면서부터였다. 그제서야 독일인들은 과거 저질러진 범죄와 대면하기 시작했다. 이 또한 철저한 자기반성의 산물이라기보다는 "나치 세대에 불복종 운동을 펼칩시다"라는 1967년 길거리에 부튼 전달처럼 68세대의 분노에서 촉발된 부모 세대에 대한 역사적 승리였다.
이 책을 읽는 내내 한국의 현대사가 오버랩됐다. 남북으로 갈라진 채 전쟁이 참상을 딛고 일어서야 했던 혼돈의 시간들 속에서 우리가 감내할 수 밖에 없던 부정부패와 폭력들 말이다. 540쪽, 2만8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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