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김건표의 인세이셔블 연극리뷰] 낭독극 프로그램 ‘창작희곡의 발견’-죽음의 진실을 부인(否認)하는 <부인夫人의 시대>, 그럼에도 희망으로 살아가는 <우체국에 김영희 씨>

김건표 대경대학교 연극영화과 교수(연극평론가)

부인의 시대. 경기도 극단 제공.
부인의 시대. 경기도 극단 제공.
김건표 대경대 교수(연극영화과)
김건표 대경대 교수(연극영화과)

지난해 11월, 김광보 예술감독의 임기가 끝난 후, 국립극단의 예술감독 후임은 여전히 공석이다. 대학로 카더라 통신으로 들려오는 소문은 유인촌 장관과 극단 유시어터 시절부터 인연을 맺은 한 여성 연출가가 김광보 후임으로 내정되었는데, 문재인 정부 지지 서명 전력으로 최종 결정 과정에서 불발되었다고 한다. 어찌 되었든 국립극단의 이전 서계동 부지(敷地)에는 임대형 민간투자(BTL) 방식으로 복합 문화시설 사업계획이 추진되고 있고, 대학로 홍익대아트센터로 이전한 국립극단은 2026년 12월까지 임시 운영 체제로 가고 있다. "우리에겐 국립극장이 없습니다"라는 구호를 내세웠던 대학로 연극인들의 저항은 결실을 맺지 못하고 끝났다. 유인촌 장관 내정 후에는 국립극단이 장충동 시대로 회귀한다는 얘기도 흘러나오고 있다. 한 해 160억 원의 세금이 투입되는 국립극단은 그동안 일부 예술감독의 편향 논란과 블랙리스트 사태(검열)를 겪으면서 곤욕을 치러야 했다. 최근 법원은 블랙리스트 피해자와 단체들이 낸 국가 상대 손해배상소송에서 원고 승소 판결로 국가책임을 인정하고 배상금을 지급하라는 판결을 내렸다. 2021년 국립극단의 예술감독으로 선임된 김광보 연출가는 3년의 임기를 채우고 올해 경기도극단 예술감독으로 자리를 옮겼다. 경기도극단 예술감독 선임 후 김광보 연출이 처음으로 받아든 숙제는 창작극 두 편이다. 2023 경기도극단 제3회 장막희곡 공모 당선작인 <부인의 시대>(이미경 작)와 <우체국에 김영희 씨>(박강록 작)를 들고 '창작희곡의 발견(경기아트센터소극장)' 낭독극 연출로 경기도극단의 무대를 만들었다.

부인의 시대. 경기도 극단 제공.
부인의 시대. 경기도 극단 제공.

◆90년대 극단 청우를 시작으로 부산시, 서울시, 국립극단을 거쳐 경기도극단 예술감독으로 돌아온 연출가 김광보

김광보처럼 한국연극의 현장을 30년 동안 지키고 있는 연극연출가는 많지 않다. 물론 90년대 초반 김광보(극단 청우)와 함께 한국연극의 세대교체를 이룬 작은 신화의 최용훈, 극작과 연극연출에서 뮤지컬과 창극으로 장르를 확장한 조광화가 있다. 하지만 이들은 국공립 무대의 예술감독으로 작품과 인연은 없다. 김광보는 1995년 극단 청우의 연출가로 대학로에 등장한 이후 부산시립 예술감독(2009), 서울시극단 예술감독(2015), 국립극단 예술감독(2021)을 거쳐 경기도극단 예술감독(2024)에 이르렀다. 한국의 대표적인 국공립극단 예술감독을 두루 거친 연극연출가는 김광보가 유일하다. 90년대 김광보 연출의 작품을 본 것은 극단 청우를 창단하기 이전 부산 가마골 소극장에서 올린 <에쿠우스>(1993)였다. 공식적인 대학로 연출 작품으로는 <지상으로부터 20미터>(장우재 작, 극단 종각, 1994)였다. 이듬해인 1995년 극단 청우를 창단하면서 <에쿠우스-이미지네이션>, <종로고양이>, <오필리어>, <꽃뱀이 나더러 다리를 감아보자 하여>(1995) 등 세 작품을 연달아 발표하며 극작가 조광화와 함께 김광보의 시대를 열었다. 이후 김광보는 <뙤약볕>, <오이디푸스, 그것은 인간>, <인류 최초의 키스>, <웃어라 무덤아>, <그게 아닌데>, <줄리어스 시저> 등으로 극작가의 텍스트를 입체적인 무대언어로 옮겨놓는 감각이 탁월한 연출가라는 평가를 받아왔다. 그의 장수(長壽) 비결은 뭘까. 역설적으로 자리에 집착하지 않으면서 작품을 만들어내는 고집스러움에 있다. 다르게 말하면, 작품으로 진검승부를 보려는 점이다.

김광보는 민간극단 작품이든 국공립극단 작품이든 김광보의 색깔로 무대를 입혀 왔다. 서울시극단에서는 <여우 인간>(2015), <나는 형제다>(2015), <헨리 4세-왕자와 폴스타프>(2016), <왕위 주장자들>(2017), <옥상 밭 고추는 왜>(2017), <사막 속의 흰개미>(2018), <물고기 인간>(2019) 등의 작품을 연출하며 서울시극단을 한 단계 올려놓았다는 평가를 받았다. 특히 서울시극단 예술감독으로 연출한 첫 작품인 <여우 인간>(이강백 작)에서는 한국 사회의 쟁점이 되었던 촛불집회, 광우병 파동, 노무현 대통령 서거, 국정원 댓글 사건, 세월호 사건을 그려내면서도 대한민국의 진보와 보수, 선거 정치, 대선 정국, 미디어 정치, 이념 대립, 정치 토론, 비정규직과 의료보험 등을 우화적으로 압축시키고 풍자했다. 낡고 허름한 다세대 연립 주택 옥상을 배경으로 공동 주택에 거주하는 인간 군상을 그려낸 <옥상 밭 고추는 왜>에서는 옥상의 소유권을 놓고 벌어지는 도덕, 윤리, 정의가 실종된 현실을 김광보의 노련함으로 그려냈다. 국립극단 예술감독 시절에는 <세인트 조앤>(2022), <벚꽃 동산>(2023) 두 작품을 연출했고, <스카팽>(임도완 연출), <조씨고아, 복수의 씨앗>(고선웅 연출), <만선>(심재찬 연출)을 국립극단의 대표적인 레파토리로 정착시켰다. 창작공감 연출과 작가 시리즈를 통해 가능성 있는 신진 연출가와 극작가들의 실험적 무대를 발굴했지만, 딱히 인식될 정도의 강력한 작품은 없었다는 아쉬움도 있다.

부인의 시대. 경기도 극단 제공.
부인의 시대. 경기도 극단 제공.

◆경기도극단의 낭독극, 죽음의 진실을 부인(否認)하는 <부인(夫人)의 시대>, 그럼에도 희망으로 살아가는 <우체국에 김영희 씨>

경기도극단 김광보 예술감독 체제가 성공할 수 있을까. 연출가 김광보라는 '브랜드'에 쏠려있는 시선을 감안했을 때 심리적인 중압감도 만만치 않을 것이다. 성공을 결정지을 수 있는 것은 경기도 국공립극단이라는 지역 한계를 넘어서는 전국적으로 이슈가 될 만한 작품으로 김광보의 목소리를 내는 것이다. 경기도극단의 지리적 위치는 지역 시민들을 위한 안정적인 작품 개발과 시스템의 유지보다는 작품성으로 승부를 봐야 하는 서울권에 가깝다. 예술감독 입장에서는 전국 국공립극단의 지역 분위기를 선점할 수 있는 역할에 대한 책임감을 인지하고 있을 것이다. 연출가로서도 경기도극단을 거쳐 갔다는 인상보다는 그동안 꿈틀거렸던 김광보의 연출 충동이 무대로 완성되는 작품으로 이야기할 수밖에 없다. 그런 만큼 이번 낭독극 두 편의 연출을 통해 김광보는 경기도극단 배우들의 역량과 극단 시스템을 점검할 수 있었을 것이다. 경기도극단 제1회 장막희곡 공모 당선작을 무대화한 작품 <위대한 뼈>(박진희 작, 한태숙 연출, 2021)는 인상 깊게 각인된 작품이다. <위대한 뼈>는 물고기로 퇴화한 '인간의 뼈'라는 발칙한 상상에서 출발한 작품이다. 인간이 물고기로부터 진화해 몸이 물고기로 퇴행해 간다는 작가의 발상이, 대한민국의 50대 가장 병태가 물고기로 퇴화해 가는 이야기로 구체화되었다. 산업 재해와 사회적 참사, 비정규직과 노동 문제, 입시, 의문사, 청년 자살, 황우석 사태 등의 사건 속으로 한국사회의 시간을 되돌리고, 그런 사회에서 살아가야 하는 병태가 대한민국이라는 거대한 수족관 속 물고기로 퇴화된다는 설정이었다.

반면 경기도극단 제3회 장막희곡 공모 당선작인 이미경의 <부인의 시대>는 현실과 밀착된 여성서사가 중심이다. 거주민을 고려하지 않은 재개발로 인한 용산 참사를 떠올리게 하는 작품이다. 제목도 중의적인데, 네 명의 부인(夫人)들의 이야기이면서 동시에 양극화를 부추기는 재개발의 불도저로 소외계층의 삶을 외면하고 사회적 참사의 진실을 부인(否認)하는 시대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재개발을 앞둔 동네 3층 건물에 위치한 낡은 피부관리실이 배경이 된다. 피부관리실을 운영하는 원장 정가실(이은 분)은 홈쇼핑에 중독되었고, 피부관리실 실장 남옥순(임미정 분)은 남편과 사별한 뒤 늦둥이 아들을 홀로 양육한다. 한국으로 돈 벌러온 조선족 출신의 송미령(강아림 분)과 한국 남자와 결혼해 폭력과 의처증에 시달리다 어린 아들을 놔두고 도망친 필리핀 여성 안젤라(장정선 분)도 등장한다. 재개발에 속도를 내기 위해 손님으로 위장한 사모님(육세진 분)이 피부관리실에 등장하고, 그녀는 피부관리실의 네 명의 부인(여성)들을 이간질로 분열시키며 피부관리실 운영을 방해한다. 피부관리실의 부인(여성)들은 남편(남성)의 폭력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여성들이면서 사회제도로부터도 보호받지 못한다.

우체국에 영희씨. 경기도극단 제공.
우체국에 영희씨. 경기도극단 제공.

이미경 작가는 극의 시작부터 한국사회의 억척스런 소외계층과 재개발 사업을 대비시킨다. 동네 건물을 부수며 좁혀오는 효과음이 들리고, 피부관리를 받으러 온 사모님의 등장과 그녀의 신분이 밝혀지는 장면까지, 부인들의 절박한 삶이 쏟아져 내리고 자본에 현혹된 욕망이 천박하게 넘실댄다. 마지막 장면에서 이미경 작가는 이들의 죽음을 UFO를 타고 우주로 이동하는 것으로 처리한다. 부인들의 피난처는 이웃의 인정(人情)도, 국가의 사회시스템도 아닌 우주라는 엉뚱하고 판타지적 설정이다. 이들이 살아가는 현실을 부인(否認)할 때 살아갈 수 있는 곳은 꿈에서나 살아볼 만한 현실이 될 수 없는 우주의 공간뿐인가. 이번 낭독 공연에서는 대사의 리듬, 장면을 상상으로 구현하는 힘과 속도, 배우들의 캐릭터화된 연기가 희곡을 전달하면서도 마지막 장면의 전환은 열린 해석을 위한 것이라 해도, 소설을 읽다가 갑자기 동화로 전환된 듯, 드라마의 전개 논리와 맥락이 불분명했다. 이 작품을 실제 무대로 구현할 때 마지막 장면처럼 동화적인 설정으로 무대를 만들면 어떨까. 낡은 건물이 마치 허공(우주)에 떠 있는 듯한 무대, 고립 속에 비현실적으로 살아가는 네 명의 부인과 사모님으로 접근한다면 오히려 <부인의 시대>는 연출적으로 재미있는 무대를 기대할 수 있겠다.

반면 우체국을 배경으로 벌어지는 비현실적 사건 속에서 현실적 감각을 놓치지 않은 <우체국의 김영희 씨>는 극 중 인물 김영희(이슬비 분)를 통해 인정(人情)의 온기를 깨워주는 따뜻한 작품이다. 극 중 인물 나상식(황성연 분)의 내면의 소리 장치를 통해 한정된 우체국 공간에서 부딪치고 만나며 평범한 일상을 함께 하는 보통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아냈다. 희곡텍스트의 낭독만으로도 전달되는 기발한 연극적 장치와 유쾌한 위트가 넘치는 발랄한 작품이다. 특히 악성 우편물이라는 설정, 악성 우편물을 보낸 사람이 우체국 국장이라는 반전이 신선했다. 극 말미 영희의 사고사는 다소 작위적인 느낌을 주었지만, 그것은 영희가 남긴 해피바이러스의 확대, 죽어서도 살아있는 듯한 영희의 존재감이 확대되는 장면으로 상쇄되며, 택배와 우편물에 담긴 수많은 사연처럼 영희를 통해 위로를 받으며 살아가는 훈훈한 일상으로 마무리된다. <우체국에 김영희 씨>는 무대 구현이 기대되는 작품이다. 이날 낭독극후에는 연출과 작가들의 대화가 이어졌다. 박강록 작가는 " 동네 우체국과 실제 우체국 직원이 작품에 모티브"가 되었다고 설명했다. 작가의 관찰과 체험적 글쓰기가 진솔하게 묻어있으면서도 연극적인 장치가 연출적으로 다양하게 변주 될 수 있는 희곡이다. 특히 청년 우체부인 나상식 역의 황성연의 낭독 연기와 김영희로 분한 이슬비의 캐릭터 설정과 연기가 <우체국에 김영희 씨>의 극적 리듬을 생산적으로 확대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부인(夫人)의 시대>와 <우체국에 김영희 씨>는 3월 6일 경기아트센터 소극장에서 입체낭독극으로 공연된다.

우체국에 영희씨. 경기도극단 제공.
우체국에 영희씨. 경기도극단 제공.

◆경기도극단의 2024년 레파토리 시즌 작품 라인업

경기도극단은 김광보 체제에서 2024 레파토리 시즌 작품을 라인업했다. 청소년극 <단명소녀 투쟁기>는 현호정 원작, 오세혁 각색, 김광보 연출로 5월 3일에서 5일까지 공연되고, 미셀 트랑볼레 작의 <메딜린 집>은 8월 31일에서 9월 8일까지 공연된다. 올해 마지막 작품이 될 <우리 읍내>(손톤 와일드 작, 오세곤 번역, 오세혁 각색, 김광보 연출)는 11월 16일부터 11월 24일까지 공연을 계획하고 있다. 김광보 예술감독은 전화 인터뷰에서 "관객 친화적인 연극을 무대화해 보편적이고 재미있는 연극으로 소통하겠다"고 포부를 밝혔다. 경기도민이 참여하는 연극 교실도 개최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이번 낭독극으로 출발한 김광보 예술감독 체제의 2년의 시간이 시작됐다. 경기아트센터는 세종문화회관 서울시립예술단 총괄본부장과 한양대학교 건축공학부 부교수를 역임한 서춘기 사장이 지난해 1월부터 책임을 맡고 있다.

우체국에 영희씨. 경기도극단 제공.
우체국에 영희씨. 경기도극단 제공.

김건표 대경대학교 연극영화과 교수(연극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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