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광해: 왕이 된 남자'는 눈 내리는 종묘에서 시작한다. 종묘는 한국에서 첫 번째로 유네스코문화유산에 등재된 곳으로 광해군 때 복원이 완료됐다. 그러나 정작 광해는 시호를 받지 못해 종묘에 없다. 역사의 아이러니다.
서울토박이지만, 토박이라서 궁은 늘 멀었다. 그러니까 밤 벚꽃놀이 구경을 가던 창경궁과 덕수궁과 경복궁이 내가 가본 고궁의 전부였다. 경희궁은 듣도 보도 못했고, 창덕궁은 굳게 닫혀있었다(책에도 나오듯이 이방자 여사가 기거했다는 낙선재는 조선왕조 500년 같은 먼 나라 얘기였다). 너무 가까이 있어서 소홀하고 무심했고 가벼이 봤던 왕궁이었다. 우연한 기회로 김서울의 '아주 사적인 궁궐 산책'을 만났다.
저자는 대학원에서 박물관과 유물에 관해 공부하는 학생으로 자신을 소개한다. 책은 크게 4장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도입부터 정갈하고 유머러스하다. 즉 서울의 다섯 궁궐(창덕궁·경복궁·덕수궁·창경궁·경희궁) 소개로 시작하는 저자는 딱 자기가 아는 만큼만 이야기하되 트렌드와 접합하는 것도 꺼리지 않는다. 문화유산을 다룬 책에서 종종 만나는 과장과 겉멋과 허세가 없다는 건 큰 경쟁력일 터.
다섯 궁궐을 소개하는 1장을 지나, 일반 백성의 집 한 채 값과 맞먹는 창덕궁 선정전의 기와와 레드카펫 격의 박석과, 왕실 사람들이 "어떤 시선에도 구애받지 않고 홀로 밤하늘 풍경을 즐길 수 있는 아늑한 개인 테라스이자 베란다"(79쪽) 월대가 등장하는 2장에 이르면 낭만은 최고조에 이른다.
고궁의 돌짐승 이야기도 흥미롭다. 김서울은 경복궁 영제교의 SNS 인기스타 '메롱 석수'를 언급하더니 근정전 십이지신상 중 말 조각은 "자로 잰 듯한 짧은 뱅 헤어"(100쪽)인데 동물과 어린이를 사랑하는 석공의 작품일 거라고 유추한다. 부용정 초석을 "바지를 종아리 위로 걷어 올리고 물가에 발을 담근 모양"이라고 표현하는 저자의 통찰과 상상력 또한 남다르다.
마지막 장 '궁궐의 물건' 편은 저자의 사적 취향과 문화재에 관한 신념이 가장 잘 드러나는 꼭지다. 현재 경복궁에는 국립고궁박물관과 국립민속박물관이 들어섰는데 혹자는 원래 관청이 있어야 할 자리에 고궁박물관과 민속박물관이 들어서 복원에 방해된다는 식으로 주장한다면서, 그러나 조선 궁궐은 이미 텅 빈 공간이라고 말한다. 즉 "오랜 시간 궁 구석구석을 빈틈없이 채웠던 생활품과 인테리어 소품들은 모두 국립고궁박물관으로 옮겨지고 외장재만 남은 셈"(151쪽)인데, 이런 상황에서 고궁박물관을 다른 곳으로 이전한다면 조선왕실의 외장재와 내장재 사이의 거리는 더 멀어지게 된다는 것. 과연, 이유 있는 주장이다.
김서울은 종묘에 모시는 왕의 신주 즉 '제왕신주목'을 언급하면서, 여기엔 구멍이 뚫려있어 왕의 영혼이 드나드는 걸로 여긴다고. 요즘의 불멍과 물멍처럼 이 신주를 통해 조선시대의 정신을 만나는 구멍에 빠지길 권한다.
게으른 감상으로 들릴 테지만 '아주 사적인 궁궐 산책'은 쉽고 재밌다. 가르치고 일깨우겠다는 의도 대신 자기가 좋아하는 대상을 알린다는 기쁨이 글 곳곳에 묻어나온다. 책을 써본 사람은 안다. 벅찬 마음을 주체하기 힘들 때 글이 어떻게 날아다니는지를. 다음번 서울에 가면 무조건 궁궐 한 곳을 둘러보리라 다짐했다.
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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